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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의 詩 - "스케치" - 詩集 [안개주의보] 중에서

2004.06.12 19:53

폭우 조회 수:1956 추천:26

                  스케치

                                           詩 : 박이도


지금은 몇시나 되었을까
멀리 숨어 지저귀는 들새들
갈대숲의 유령들이 서향으로
휘감기고 있다
작은 함성을 지르며
흩날리고 있다


들에 서면 항상 나그네
돌아갈 집을 생각하다가
머리 위로 황급히 날으는 새들의
푸덕이는 소리에 나를 발견한다


여기에 서서
오래 오래 홀로 서서
다시 나를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은 쟂빛 하늘
희끗 희끗 어디선가부터
눈발이 날리고
지아비도, 지어미도 떠나간



빈 들판
누군가 말을 건네고 싶다
몇마디씩 힘있는 사랑의 말을


헨델의 和聲처럼
무중력으로 쏟아지는
순백의 언어들
마침내 한 줄의 시가
탄생하는 이 들판에
나는 오래 오래 홀로이고 싶다


지금은 몇시나 되었을까
곧 눈보라가 치겠지
곧 어둠이 나를 자유케 하겠지
여기에서는
모두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