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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시인 박이도 - "나의 첫사랑의 시인-詩"

2004.06.01 01:42

폭우 조회 수:7337 추천:26

박이도시인은 내가 처음 시를 사랑하게 한 시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목사님의 책으로 빌어읽은
그의 시집 "안개주의보"와 " 불꽃놀이"에
아~ 이렇게 서정시에도 아픔이 있구나 느꼈었다.




                                       1998년 현대시 커버스토리 / 박이도

     詩的 無心과 종교적 唯心의 한가운데

                                   - 꽃물 같은 석양의 강 위에/떠내려가는 노동이여. 별들이여. ─ <황제와 나>

                                                   - 우리 사이에 영원은 없고/잠시 헤어짐뿐이니 ─ <분명한 사건>

                                                                                                                                김 강 태


갑년을 맞은 시인

‘이미 영감inspiration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간단없이, 과연 예술가 특유의 기질인 영감의 세계는 없는 것일까. 이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나의 심경이다. 그것은 특히 시·작곡·그림 같은 예술을 볼 때 단순한 노력이나 지식만으로 완성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정도 시인다운 예술가적인 기질을 지닌 것일까. 그것은 계속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시인은 나를 만나면서 이렇게 망설인다. 나는 못 됐다. 벌써부터 비틀기 시작하려니까 그가 정수로 맞는다. 어허, 좋은 바둑 맞수가 되려는가. 그런데 그는 취미가 없다. 바둑이나 놀음 등, 도무지 재미가 없다. 수석을 취미에서 특기로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석壽石을 굳이 수석水石이라고 표기하며 산돌이 아닌 물돌(水石)을 못내 좋아한 채석광採石狂 박두진 선생 탓이다. 돌이다, 돌! 말없는 돌멩이에서 시인은 삶을 갈고 닦는다. 시인 임영조가 한때 난에 환장했던 것처럼, 박 시인도 수석이라면 지금 윤택의 경지? ‘탐석探石(貪石?)이란 자연을 품에 안는 일’이라는 호연지기를 펼치셨던가… 여기는 사당역, 사당역! 7번 홈에서 나오자 마자 맞은편의 정 커피 ☎ 587-2337). 이렇게 촌스러이, 쑥스럽게 멀뚱히 우린 만난다. 곧장 마담언니 눈치 보며 이거저거를 묻고 답한다. 자료를 펼친다.

시인 박이도는 올해 갑년을 맞았다. 의미가 있다면, 마음으로부터 축하드리고 싶지만 웬걸, 내가 만난 시인은 아직은 골덴 바지에 벽돌색 폴라 티를 입은 생생한 청년끼(!). 아니, 60을 사셨다구요? 무슨 영양 공급이 있으셨나, 오호, 부인이 잘 챙겨 주시는가. 슬쩍 알아보니 부인과는 딱 10년 차이(너무했다). 그는 후허허, 웃을 뿐이다. 그래서 난 또 예의 가벼운 객기가 발동한다. 점잖아지려니 나의 펜이 벌써부터 까탈부린다. 여기는 사당역, 사당역.



시적 체험과 개신교 집안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탓으로 어려서부터 그는 교회에 따라다닌 일에 얽힌 추억이 많다. 추억이란 개인적인 경험에 머무는 것이기보다는 소외된 하나의 집단이 엮어내는 특수 문화에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나아가,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를 찾아 살아가는 생활 양식에서 얻어진 특이한 공동 체험이며 감동의 뉴앙스가 항상 교차되는 긴장의 세월이기도 하다. 그 시기에 박이도는 아름다움/성스러움 같은 낱말의 개념을 언어로 익히기 전에 먼저 문화적 행위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의 말 중에는 ‘문화적’이란 표현이 꽤 많다.)

아직도 생생한 어린 시절의 도둑질 기억―. (대화 내용과 글을 다듬는다.) 그가 다니던 교회(평북 선천군 노하면 노하읍路下邑) 유치원에 입학한 그는 엄청난 비밀을 갖는다. 원생들은 교회 지하실(반지하)에서 노래와 춤, 공작놀이 등을 배웠다, 선생님이 하는 대로. 하루는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색종일 접어 새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색종이 작품을 모두 전시용 테이블에 나열한다. 며칠 뒤 주일학교에 온 소년은 유치원 지하실로 발길을 옮긴다. 며칠 전부터 기회를 노린 것이다. 많은 색종이 작품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 하나, 그가 남 몰래 좋아하던 한 여자애의 작품. 그걸 얼른 웃저고리 가슴 속에 넣는다. 가슴이 뛰었다. 흰 얼굴에 머리가 길었으며, 유난히 목소리가 예쁜 어떤 가시내 것을 순간적으로 훔친 것이다. 허둥대고 집까지 뛰어왔으나 색종이 새를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소년은, 집안 식구 모르게 장롱 밑에 밀어넣는다. 다음날 아침, 유치원에 가는 일이 무서웠다. 색종이 작품을 가져간 아이를 꼭 찾아낼 듯한 선생님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슴이 콩닥이던 소년은, 결국 다시 몰래 갖다 놓는다. 이 사건은 어린 그에게 큰 두려움과 죄책감을 맛보게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박이도의 시인적 면모를 흘낏 훔친다.

나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주 뜸부기를 만났다. 뜸부기는 논에서 운다. 나는 뜸부기가 좋았다, 항시 내 곁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어느 날, 뜸부기 한 마리가 절뚝이는 걸 보았다. 눈에서도 이미 피눈물이 돌아 처연했다. 접동새 울음이 이랬을까. 나는 불완전한 새를 손쉽게 찾아 가슴에 안는다. 아, 따스스… 옥도정기를 바르고 좁쌀도 뿌려주었으나,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지는 어린 체험을 하는 동안 그만 새는 자기 숨을 스스로 접고 만다. 동산 한켠에 묻는다. 나무 십자가도 매주며 기도도 해주었다. …지금도 내 가슴엔 항시 새 한 마리가 있다. 날고 있다, 키우고 있다. 《데미안》이란 새. 중3 때, 헤르만 헤세를 읽고 나는 흐느꼈다. 그의 동양적 신비주의풍의 감성이 나를 유혹했다. 소월보다는 영랑이 더 좋았다. 실상 슬프지도 않은데,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어린 게 무얼 안다고, 너 연애하냐고, 휴가 나온 형에게 꼴밤을 먹고 난 뒤 아퍼서 또 울었다. 그때 나는 싸개싸개 오줌싸개요, 왕울보였다.

박 시인은 현재 ‘새’라는 테마로 신작시집을 계획하고 있다. ‘새’라… 갑자기 떠오른 아이, 정아. 15년 전 쯤에 내 수업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정아는 눈이 참 맑고 예뻤다. 그애가 가기 전에 보인 눈물은 외로움, 한동안 그것이었다. 나 혼자 그애 이름을 ‘새’라고 지었다. ‘선생님은 거기에, 전 여기에, 아직도 계셨군요’로 시작하는 최근 편지. 신록의 어느 날, 창가에서 책을 읽다가 나는 정아와 똑같은 새를 목격한다. 하얀 점박이 까만 작은 새―. 그 새가 비를 피하며 나무와 잎새와 나무와 나뭇잎 사이를 난다. (그런데 가만히 나뭇잎, 하고 소리하면 박성룡의 ‘풀잎’ 그 동그만 입술소리가 닿는다.) 내 곁에서 막연히 떨며 울던 정아의 어깨에서 진한 ‘체읍’의 참뜻을 느껴 혼났지. 이미 훨씬 어른이 되었을 그녀가 참 그립다. ‘새’라는 보통명사가 참 좋다던 정아… (방금 미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별안간, 이처럼 응축시킨 대화를 통해 나는 그에게서 시인의 감성을 깊숙이 감지한다. 박이도의 시인적 면모 말이다. 시인은 어릴 적부터 키워진다? 나의 깊은 믿음이다. 그는 유치원을 문화적 양식을 수용, 행위하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경쟁심과 자기 과시 본능이 어울려 인격 형성에 크게 영향 받았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렇다, 박 시인은 아직도 그의 유년 시절을 황홀히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그의 가슴은 연분홍에 쉬이 물들곤 한다. 지금 내 눈에 비친 시인은 소풍 가는 아이같다. 젊게 웃는다. 아마, 그런 모습으로 아내와 알랑달랑 살아가리. 부인이 애써 골라주었을, 그가 입고 나온 저 폴라 티처럼 환한 젊은이 모습으로―. 박 시인이 자릴 옮기자고 제의해서 근처의 낙지 전문집으로 간다. 원조집 ‘갯마을’(☎588/597-7892), 맛있다. 아줌마 손도, 낙지도 곰틀곰틀. 서비스 좋∼다. 신앙인인 서로는 낙지데침과 밥비빔을 민둥민둥 먹는다. (우린 신앙인이므로!) 나는 몸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날아갈 듯 싶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추상에 입각한다’? 마르쿠제의 말이다. 모든 시인에겐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은 바로 ‘내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물새의

하얀 깃털이 하나 떨어진다

무대 위 어디에 내릴지

사뿐사뿐 내릴 듯 말 듯

그렇게 애태우는

그대의 발끝은 멈추지 않는구나

─ <춤의 혼이여> 부분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나는 박이도라는 물새를 맞이하여 하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린다. 이곳은 사당동 무대 한켠. 그(대)의 말씀이 ‘사뿐사뿐 내릴 듯 말 듯/그렇게 애태우는’ 듯하구나. 그가 교회 다니는 건 온 나라가 다 안다. 나도 댕긴다. 사람들이 놀란다. 그리곤 이마를 짚는다. 덩달아서 헛헛, 나도 이마를 짚는다. 나는 의식儀式을 자주 갖는다. 새벽 공간에서부터 그늘까지, 거기 혼자 있는 게 좋아서. 교회 다니면서 나는 카톨릭 학교를 다녔고 불교 대학교를 나왔다. 엉망(?)이나 내겐 지존지엄한 과정이다. 나는 요즘도 주일 아침마다 성도들에게 꾸벅꾸벅 얌전히 인사한다. 그런데 그리 성실치 못하다. (이게 문제다. 종교가 문제다.)

바람 부는 어느날, 단상에서 난생 처음 갑작스레 공중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그게 그만 웅변을 해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도 말을 더듬었던고. 왜 드라마 <용의 눈물>에 나오는 이무기(?)의 ‘통촉하소서’에 취해 흉낼 냈는지, 휴우,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아내는 뜨거운 콧김을 뿌슉뿌슉 내뿜고, 엉터리 기도문이 막힐 때마다 주변에선 ‘주여, 주여’ 한다(참 고마웠다). 그런데도 오기로 침 튀기며 10분을 기도했다. 하늘님이 내 머리통을 향해 정신봉을 휘두르지 않으신 게 천만다행. 다음 날부터 들려온 말을 요약 정리하면 ‘전무후무前無後無’. 아내가 내게 (말) ‘로만氏’에 이어 새로 붙인 별명이기도 하다. 아내가 ‘전무후무!’ 하고 외치면 난 얼굴 찡그리고 뒤를 쳐다본다. 이 어려운 종교 의례를 박이도 시인은 용케 물들어 있다니.

어린 시절, 그는 교회 출석이 가끔 귀찮을 때가 있었으나 정서적 감흥이 있어 좋았다. 특히 추운 겨울철, 교회까지 걸어서 십리 정도의 거리를 여럿이 같이 다니던 추억,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달 가까이 성극聖劇 등을 준비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다닌 일… 어른에 이끌려 조무라기에서 청소년 또래까지 한데 뭉쳐 추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돌아온다. 초롱불을 든 인도자의 뒤를 따라 너울대는 그림자를 밟으며, 뽀드득 소릴 내며 눈밭을 걸어 귀가한다. 그러다가 동네 어귀에 이르면 집집마다 개 짖는 소리 들리고, 이윽고 우린 무서움에서 벗어나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어두운 밤길, 추운 겨울 바람과 초롱불을 따라가는 행진이 왜 이리도 그리운가.

어쩌다 방문한 미 선교사 집에서의 이상異常 체험, 그들의 용모나 언어, 서투른 우리말 솜씨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인상들. 또 저들의 실내 문화라 할 여러 장식과 가구 등이 아직도 매우 강렬히 다가온다. 상상력에서부터 모험심, 혹은 아름다움이나 경건성이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눌러왔다고나 할까. 교회에 방화일方化日(一?) 목사란 젊고 열성적인 분이 새로 부임한 일도 새롭다. 해방이 되자 박 시인의 가정은 월남하고 6·25 동란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간다. 그 무렵엔 방 목사도 대구지방에 살았다고. 그런데 한밤중에 방 목사 집에 미 흑인병사가 강도로 침입하자, 유창한 영어로 타이르는 그를 병사가 총을 쏘아 숨지게 한 것이다. 이처럼 그의 유년기의 강렬한 추억은 대부분 교회에서 보고 겪은 일들이다.

‘선생/선생님’에서 자연스레 ‘우리’가 된 우린 요즘의 문인선교회를 떠올린다. 초대회장 김소엽(호서대) 시인의 행방이 묘연한가 싶더니 그녀는 문인선교회의 밀알로 활동하고 있다. 웃음이 화사한 그녀와 나는 ’78년 여름, 월간 《한국문학》의 같은 지면에서 함께 데뷔했지, 미당·박재삼·이근배 시인을 통해. 우린 오랜만에 기독 문인들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들이처럼 박 시인도 가끔 그 곳엘 나간다고 한다. 그의 기독시基督詩 몇 수를 관찰해보자.



한 고을에 노을이 진다

집집마다 골방 열쇠 잠그는 소리

밤안개 속에 번져가는 부엉이 울음

나는 기도실을 뛰쳐 나갔다

어디서 밀려오는 어둠일까

아― 저녁의 은혜, 和平

먹칠하듯 어둠이 휘몰아오는 누리에

이 저녁의 숲은 秘境이구나

나는 구석구석마다 뛰어 갔네

거기 많은 사물을 익혀 두고

마지막 현상 앞에 靜止한 빛이

위대한 신앙의 표적으로 복제되는 모습을…

─ <洗禮 以後> 부분



그는 ‘<洗禮 以後>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신앙의 차원이 아닌 새롭게 인식되는 세계에 대한 경악이요, 동경의 것들이다. 소재들의 특이성이나 사물에의 감성들이 결합되어 빚어진 시구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물에의 긍정적인 인식이요, 비상하는 비둘기의 나래짓 같은 이미지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유년기의 정서적 이미지들을 재현시키는 과정은 문학과 신앙의 두 차원을 교감시킨 것들이다. 이 두 차원을 하나의 포커스로 바라볼 때 그것들의 관계를 쉽게 구별해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박 시인은 비판적이고 선별적인 과정 없이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 생활의 연장으로 이은 경우에 속한다. 문제는 그 기간동안에 한번도 자기 신앙에 대해 심각한 회의에 빠져보지 못한 것, 소위 신앙적인 위기에 한번도 빠져보지 못한 점이다. 나는 이를 자연스레 맹목적 긍정적인 성격이 형성됐다고 판단한다. 적극적 진취적 성향이 그에게 좀 부족한 건 아닐까.



이성의 깊이에서 살얼음이 깨어진다

감성의 깊이에서 풀꽃들이 흩어진다

신앙의 깊이에서 연민의 울음이

깊이 깊이 나의 현실을 난타하고 있다.



지금은 발견의 때,

現身하는 三位는

저 어둠 속의 나그네와 같이

문밖에 쓰러져 이슬에 젖는다.

─ <發見> 부분



그는 이 시가 뜨뜻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반성이요, 참회의 의미로 썼다고 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각성, 절실해지고픈 욕심 끝에 완성된 시편이다. 시의 후반은 ‘나의 소유였던 한 줌의 생명은/꿈의 저쪽으로 떨어져 가고’, ‘커다란 신의 그림자를 따라/불빛을 찾아 아침으로 환원하는/발견의 시간’ 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신적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자기 신앙행위에 대해 회의하고 거부하는 이성적 갈등이 없었다는 점을 무척 아쉬워 한다. 곧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절실히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 놓임을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낀다. 이런 신앙적 성장 여건은 그에게 종교와 문학의 상호 영향을 생각케 했다.

다시 그는 간추린다. ‘헤브라이즘이 꽃핀 서양의 중세사를 보면, 신神 중심의 사상을 기반으로 모든 문화가 전개된다. 물론 그같은 풍토에서 인간 중심주의를 표방했던 헬레니즘이 대두될 때, 앞의 것은 인간의 자유분방한 문화활동을 억압했다고 해서 암흑시대로 지칭하기도 한다.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관찰하건 간에 우리는 지금 그 시대를 기독교 문화가 꽃핀 시기’로 본다고. ‘가령 단테가 쓴 《신곡》의 경우, 기독교적 사상이나 의식이 충만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기독교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독교적 생활 터전에서 기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단테의 인격이 형성되었기에 거대한 작품이 나왔으리라’는 고백도 아울러.

박이도 역시 기독교라는 신앙적 울타리 안에서 문학을 수용하는 과정을 밟았으며 그의 문학 속에 나타난 신앙적 요소는 결코 종교성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물론 예외적인 시편들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인 Anselmus의 명제인 ‘나는 믿기 위하여 알려하지 않고 알기 위하여 믿는다. 나는 믿는다… 내가 믿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바꾼다.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알려하지 않고 기독교를 알기 위해 시를 쓴다. 내가 시를 쓰지 않으면 신앙적인 나를 알 수 없으므로…’ 안셀무스의 명제에 그의 문학의 종교적인 뉴앙스를 빗댄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는 크리스마스 시가 많다. 장로 직분을 지닌 그다. ‘(내가) 하늘 속에 화살을 쏘아 올리면/地上의 모두는 하늘 속으로 뛰어 올랐다/내가 사도신경을 외우면/일제히 붉은 악귀가/겨울 헛간의 구석으로 몰려 섰다가/反芻하는 황소의 힘을 뽑는다/내가 노래할 때/세상은 노래 속에 잠기고/고귀한 生命이 하나 탄생한다’는 <메아리>(부분)는 신앙의 힘이 유달리 짙게 밴 작품이다.

그는 유년기에 민족사의 수난을 직접 겪는다. 해방 직전, 소학교에 입학하고 신사참배에 참가한 사실이 지금 부끄럽다. 부모님께 적당히 우물쭈물하고 정식으로 참배하지 말 것을 교육받기도. 조회시간에 일본 국왕에게 절하는 의식을 갖고, 왜식 각반인 붕대같은 걸 두르고 다닌 경험도 있다. 하늘 높이 B-29기가 흰 연기같은 걸 남기며 사라질 때면 뒤늦게 읍내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왜 비행기가 사라진 뒤에 뒤늦은 사이렌이 울릴까, 어린 박이도의 의문점이었다. 그의 산문을 보자.



종종 하늘 높이 비행기가 하얀 연기를 뿜어내듯 지나가면 방공 사이렌이 울리던 일, 소학교 일학년인 학생들에게도 관솔을 일정한 양의 책임하에 따러 다니게 하던 곤욕스럽던 그 무렵, 하루 아침에 ‘해방이다…’ 소리가 동네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중략…) 이른 아침 아버님께서 식탁용 원탁(네 발을 접는)을 마루에 펴 놓으시고 태극기를 그리고 계셨다. 어디서 꺼냈는지 구겨지고 허름한 작은 태극기를 펴놓고 서투른 솜씨로 그리시면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됐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 <8·15의 영상> 부분



이 무렵, 험한 산은 아니나 관솔을 따러 다니는 동네 형이나 어른들을 따라 가본 산 속은 소년에게 하나의 별천지처럼 느껴졌다. 저녁이 되면 금방 어둠이 깔리고 무서운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 오던 생각. 그때의 자연 체험은 ‘일종의 숭고에 가까운 사실성에 근거했다’고 부연한다. 문득 눈빛이 어떤 감회에 물든다. 여전히 그는 이런 시심으로 학문에 가까이 간다. 난 경희대 국문과를 조금은 안다. 마음으로 좋아하는 황순원·김재홍 선생, 박정만·박남철·전원책·박덕규·하재봉·이문재 등을 포함한 좋은 작가들과 작품이 가까이 있으므로. 시인의 제자 중엔 나와 같은 직장인 박사과정의 홍태한·김영수, 산악반 출신의 멋진 문방근 제씨도 있다.

박이도의 詩를 읊는다



석양의 때, 숲속에 가면/나는 한 마리의 사슴/숨죽여 바라보는/西天의 불길에 환성을 울린다/(…중략…)/고요를 깨워서/저녁의 우렁찬 메아리로/석양 앞에 화답하고 싶구나/이 많은 나무와/짐승과 새들의 목청을 합해서/세계의 끝까지 퍼지도록/이 숲속의 交聲을/나는 지휘하고 싶구나

─ <돌아오지 않는 화살> 부분



이 시는 유년의 고향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가장 야심찬 서정이다. 그는 이때 얻은 자연의 정신, 자연의 아름다움이 평생을 두고 살아나는 또 하나의 문학적 자산으로 자부한다. 이때 부모와 함께 묘향산에 다녀온 일행 중의 한 분이 혼자 하산하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호랑이에 놀라 기절했다는 이야기는, 어떤 옛날 얘기보다 더 강렬한 상상력의 바탕이 된다. 평양으로 나들이 간 부모님이 약속한 날에 오지 않음으로써 맛본 소년의 비애감은 생애를 통해서 가장 큰 것이었다. 하루 이틀 기다려도 오마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던 무서운 초조감. 저녁 기차 역전에 나가 열차가 도착하고 손님들이 내려 역 구내로 빠져 나갈 때, 오마던 어머니 모습이 뵈지 않을 때의 그 어린 마음… 이때 진실한 그리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시인은 ‘그 후 그만큼 절실한 그리움이 또 있었던가’ 하고 회상에 잠긴다.



내 回想의 숲속엔

이제 아무도 거닐지 않는다

밤바다에 닻을 내린

木船의 꿈처럼

뒤척이는 물소리에 사라진

내 어린 그림자의 행방을

이제 아무도 모른다.

─ <回想의 숲 1> 부분



이 개인사로서의 유년기 체험은 교회 중심의 신앙적 차원과 양립하여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 호젓이 앉았는 자체가 좋았다. 이런 성격을 짐작할 만한 사건을 또 하나 소개하자. 그의 초등교 5, 6학년은 서울에서 다닌다. 6학년 3반 반장을 맡은 해 가을, 대운동회날. 소년은 많은 학부형이 모인 운동장 앞에 서서 구령하며 지휘하는 것이 싫어서 실제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결석을 해버린다. 이 사실이 담임선생님께 알려지고 가벼이 야단맞는 정도로 그쳤지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소심한 짓거리였다. 내향성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참여하는 걸 그땐 왜 그렇게 부담스러 했을까.

그는 스스로 소외감에 빠져 가끔 ‘그림자처럼/풀밭에 누워 잠들고 싶어요’(<내 영혼이 풀밭에 누워 1>)라며 깊은 의식의 잠에 빠진다. 또 ‘먼 산봉우리에/눈사태가 났다/피어오르는 피어 오르는/무수한 사랑의 떼,/사랑에 醉해가는/나의 思春期’(<사춘기>)라고 노래한 유년기 영상은, 필름처럼 지나간 시간의 재 위에 꺼지지 않는 불길로 항상 살아있는 정서로 다가온다. 어느 들밭에서 어쩌다 들어본 새 소리나 겨울 나무가지 위서 떨어지는 눈덩이 소리에도 신비향神秘香이 느껴지는 순간들을 그는 무척 감사하고 있다.



몇 편의 詩作들

박이도는 창작 체험에 대한 글 <시적 동기는 어떻게 오는가?>(《시와시학》, 93년 가을)에서 ‘한 상황 속에서 사물의 특수성과 시인의 정서적 특수성이 서로 교감하는 순간에 시적 동기가 다가온다’고 말한 바 있다. 아울러, 시상을 적극적으로 떠올리기 위해 우선 관찰자로서의 부지런한 근성을 보이라고 주문한다. 여기서 절실함이 눈물로 번질대는 시를 보자.



성 밖으로 성 밖으로 병정만 내어보내고

그는 잠시도 나설 수가 없구나.

가난한 농부의 미소를, 그리고

해마다 자라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구나.

무성해가는 수목의 의지를

노을빛 더불어 영글어가는 과실의 풍경을 그는 볼 수가 없구나.

아 황제여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왜 울었을까. 그는 하많이 울고픈 순간들이 많았을까. 그의 데뷔작 <황제와 나>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우리 황제는 모른다. 성밖의/그 황토와/이슬과/구름과/햇빛으로 생성되는/찬란한 또 하나의 영토를/그는 모른다’. 시적화자는 어떤 황제가 되고 싶었을까. 홍사용의 ‘눈물의 왕’이 되고픈 건 아니었을까. ‘파아란 하늘, 그 주변에 팽창하며/푸른 이파리를 거느리고/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잡아먹고/확장해가는 고요한 영토를/그는 진정 모른다’는 시대의 배경을 우리가 알 만하지 않은가, 시인의 내면적 저항을. 그리고 아름다이 외친다, ‘피가 흐르는 꽃물같은 석양의 강 위에/떠내려가는 노동이여. 별들이여.’ 이 구절은 매우 황홀한, 박이도의 뛰어난 감수성의 귀한 대목이다. 고고한, 도도한 아우성이다.



밤이 되면/우리는 모두 커튼을 내리운다/방안은 모든 주변으로부터/완전한 자유를 얻는다/그러면/희미한 달빛 속에 남아 있는 生靈들은 서로들 수런거리며/불평들 한다.//능금알들은 툭툭 떨어지고/그 잎새들은/불어오는 바람을 거역하고/말하자면/커튼이 내려진 방안에선/무엇을 하느냐고 수런거리며/불평들 한다//따뜻한 햇볕에 나왔던 나비들이/저마다 사랑하는 꽃들을 잠재우고/돌아간 노을에/초롱초롱 별빛이 밟혀지며/이제는 환한 달밤,/어두운 방을 둘러싸고/이슬이 내린다//(…중략…) 정말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어두운 방안에서/완전한 자유 속에서

─ <房> 전문



윤동주의 분위기마저 연상되는 이 시는 한 시대의 우울한 산물임에 틀림없다. ‘밤이 되면/우리는 모두 커튼을 내리운다/방안은 모든 주변으로부터/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시구는 어둠과 밝음의 변증법에 천착한 시인의 모습이 애처럽게 그려진다. 그에게도 이런 젊음이 있었다. 저항이 도도히 살아오른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시적 발상은 그의 시에서 단골 메뉴다. ‘가을 꽃에 숨어라/가을 꽃에 숨어라’고 절규한 시 <溺死>(전문)는 슬픔의 정조(=哀想)를 이루었음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못다한 사랑나눔? 그의 시적 역량이 한 다발 꽃향으로 리드미컬, 다가온다.



누구와 살다 이 세상을 떠났나

못이뤘던 사랑이 파도에 밀려나와

수런대는 갈밭에 보름달을 띄웠네



육신은 어찌할꼬

달빛에 드러난 저 얼굴,

울고가는 기러기 사연에

외롭다 하직하는 낙엽 속에 묻어라



찬비 오는 하늘에 오를까

해밝은 모래밭에 누울까

의지할 곳 없는 영혼

가을 꽃에 숨어라

가을 꽃에 숨어라



이에 비하면 1)<모자>는 흥미롭다. 젊은 시절의 실험적인 재치마저 감지된다. 작별―. 나는 어릴 때 밀레의 <만종>을 보며, 모자를 벗어든 농부의 손에서 성스러움을 보았다. 주인공의 모자와 고개 숙임이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이다. 노을에 물든 부부의 표정이 모자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구나, 이 느낌에 나는 가끔 서양식 인사를 흉내내곤 했다. 석양은 마치 내게 멋진 신사였고, 그는 늘 나를 향해 ‘아듀, 아듀!’ 인사하는 환상에 휘묻게 했다. 2)<겨울 나그네> 또한 ‘작별’을 새로운 각도에서 노래한다. 온통 쓸쓸하다. 하얀 폭풍이 일고 둥지가 떨어지고, 새들이 날아가고 열두 사도가 떠나간다… 오직 헛기침만 남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에서 아름다움을 낳는다. 도리어 아름다움을 켠다. 시인의 감성이, 쟁그렁 울림으로 남는다. 나는 이 쓸쓸함을 박이도만의 특유의 내성으로 관찰, 결론짓는다. 본디 사람은 쓸쓸치 아니하냐! 시인 이형기 풍風의 유미적 허무주의를 알아야 더 이상의 지독한 니힐에 빠지지 않으리. 나는 애상이 깃든 환상적 별리를 예감케 하는 두 작품에 매료된다. 그의 젊음 또한 유미주의였으리. 외람되지만, 지금의 박 시인에게 이런 감성의 수혈이 긴급한 터. 감성은 전혀 늙지 않는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1) 소시민의 거리를 빠져나와/저 골목으로 들어가면/나는 비어있는 주머니에/주먹을 찔러 넣고/한참동안 서성거릴 것이다./(…중략…)/그러나 나의 결론은/아듀!/하늘 높이 모자를 흔들며/작별을 고해야지.



2) 지상엔 하얀 폭풍이 인다/나뭇가지 위의 새둥지가/툭 떨어지고 새들이/포롱포롱 황급히 떠난다/굳게 닫힌 성당 문이 삐꺽/천정에 누워있던 12使徒가/모자이크를 털어내고 걸어 나온다/뚜벅뚜벅 눈 속으로 떠나간다/그 뒤를 내가 따라 나선다/열 둘 그리고 열 셋의 발자국이/하얀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발자국 뒤로 남는 헛기침 소리



그러나 박이도에겐 <소시장에서>(전문)와 같은 아픈 시도 있다. ‘가난을 풀어가는 길은/너를 소시장에 내놓는 일이다’는 시구는 우리를 절게 만든다. 부황뜨게 만든다. 너란 놈은 작은아들쯤 된다,고 다시 아프게 말한다. 얼핏 설핏, 핏빛 절규다. 신경림의 이미지가 섬뜩이는 듯한 소중한 작품 앞에서 나는 몇번이고 발바닥을 비비며 망설인다. 우골탑牛骨塔, 시골애가 공부하는 길은 오로지 당대 재산 1호인 쇠뼈를 갈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종국에 자식이 상아탑을 쌓았던가,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우리들 저 우울한 시대의 실상, 바로 아버지 어머니의 마지막 노동은 한숨의 재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영원은 없고/잠시 헤어짐뿐이니’(<분명한 사건>), 부모의 ‘자식子息’들아, 이 시를 거듭 거듭 외우자.



가난을 풀어가는 길은/너를 소시장에 내놓는 일이다/한숨으로 몇 밤을 지새고/작은아들쯤 되는 너를 앞세우고/마을을 나선다/너는 큰자식의 학비로 팔려간다//왁자지껄 막걸리 사발이 뒹군다/소시장 말뚝만 서 있는 빈터/찬 달빛이 무섭도록 시리다/헛기침 같은 울음으로/새 주인에 끌려가던 너의 모습/밤 사이 이슬만 내렸다//우리집 헛간은 적막에 싸이고/아들에게 쓰는 편지글에/손이 떨린다/소시장에서 울어버린 뜨거움/아들아, 너는 귀담아 들어라/오늘 우리 집안의 이 아픔을



생명있는 감수성의 시

시집 《바람의 손끝이 되어》(문학예술사, 1980)를 펼친다. 그는 여기서 ‘시인의 감수성’을 얘기한다. 시를 쓰는 행위가 매우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그. 시인이 많아서도 아니고 시 독자가 적어서도 아니란다. 시를 쓰는 사람이나, 시를 논하는 사람들의 시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감수성은 어떤 유파의 시에서도 기본 바탕을 이루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데, 시가 지식이나 이념적 구호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이미 낡은 상념이다. 시의 외적 형식이나 언어 문제보다는 내적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확고히 한 다음에 시적 감수성을 발휘해야 하리. 시가 사상적인 염색을 꾀하는 목적 수단이 아닌 바에야 더 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다분하다.

공감한다. 문제는 진정한 감수성이다. 그렇다. 문제는 이론상의 전제 말고 진정한 의미의 감수성 배양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 감수성(=감성)은 비평가들로부터 대체로 무시되어 있다. 시인아, 우리 모두 감성으로 무장하자. 시는 이론이 아니다. 논리로 풀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일시 고개를 숙인다. 여기는 박이도 시인의 詩터. 지금 시인의 텃밭마당에서 헤매고 있다. 실제로 그의 시는 큰 변화가 없다. 담금질의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이게 불만이다. 때로는 자기 위안에 집착하는 경향도 보인다. 자신을 가로막는 존재가 무엇인가. 종교인가, 아니다. 종교란 삶의 한 지표이지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 터, 그렇다면 당신은 왜 벌써부터 안주하시려는가, 늙었는가, 낡았는가? 시인의 부인이 남편에게 ‘젊은 시詩의 폴라 티를 입혀주기’를 애써 고대한다. 박이도 시인은 아직 늙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문학에서만큼은 기막힌 감성 예찬론자다. 계속되는 산문을 보자.

시의 본질은 철저하게 서정의 감성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보면 시의 효용성도 자명해진다. 시가 ‘쉽다’‘어렵다’ 하는 문제와 연관시켜, 시의 수준을 논할 수는 없다. 즉 시는 대중을 계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심성을 순화醇化시키고 정과 열을 얻을 수 있는 고도의 성능을 지닌 안테나 역할을 해야 한다. (…중략…) 시에서 감수성은 마치 안테나와 프리즘 스펙트럼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리고 박이도 시인은 원칙론자다, 대개의 종교주의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이 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교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삶이 내내 건조할까 겁난다. 계속 마주보기를 하니 ‘거짓말도 보여요!’라는 요염한 고소영의 CF, 그 염결성마저 보인다.(김강태는 왕자병, 고소영은 공주병. 현재 모두 다 중증重症이다.) 그는 누구 앞에서 거짓뿌렁을 못한다. 아예 하는 법도 모른다,라고 콩콩 못박는다. 활달한 이미지의 현란한 하수下水 처리 과정에서 지금까지 시인은 어떻게 버텨왔을까. 대인관계도 조용하다. 땡, 치면 연구실이나 강의실이요, 땡, 하면 집이라니. 집에 무슨 황금무쏘라도 키우시나. 그는 또 강조한다. 비평가는 ‘비평을 위한 비평이 되지 말고 문학작품의 질을 올바로 가늠할 수 있는 비평적 센스부터 있어야겠다’고. 열댓 번도 더 맞는 말이다. 그가 좋아하는 비평가는, 외부인으로 부산대 김준오 교수다. 시인은 김 선생의 학자적 면모와 탐구정신을 깊이 신뢰한다. 그러나 화제를 바꾸자. 이만치서 나는 감히 박 시인이 유머 감각을 키우셨으면 한다. 유니크한 박이도를 상상해보자. 넉넉 풍성한 감각에 굵직 씨니컬한 시각은 참으로 볼 만할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 곁에서 그를 잠시 ‘추방’해야 한다, 끝이 없는 초원이나 범람하는 바다로.



가족사 및 성장 과정

·1938년 양력 1월 16일, 평북 선천군 남면 외할머니 집에서 부친 朴承赫목사와 桂龍珠 여사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남. 그 후 군산면 진석동으로 이사. 해방 이듬해까지 살다가 공산당에게 축출 당해 평양 친척집에서 5, 6개월 은신하다가 월남. 해방 당시는 노하초등교 1학년에 재학중. 서울로 남하하여 옹진군 용연면으로 이사, 그 곳에서 용연초등교 3, 4학년을 다니고 다시 서울로 이사함. 이태원초등교에서 5, 6학년을 마치고 대광중학(’51. 3.)에 입학하자 6·25 남침으로 부산·통영·제주 등지로 전전하고 국군이 환도할 때에 상경, 대광고 졸업. 그 후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한 이듬해에 학보병으로 입대. 제대 후 경희대에 편입학, 63년 2월 졸업.

·6·25사변으로 인해 중학 과정을 한 학기밖에 수업 받지 못한 관계로 고교 학업에 지장이 많았음. 특히 수학·물리·화학 등, 기초 없는 과목을 정상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으므로 대학 진학에 큰 타격을 입다. 문학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형님 利源으로부터. 형님은 초등교 2학년 과정까지만 일어를 공부했음에도 일본말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하고, 나아가 우리글로 된 문학 저술을 탐독하는 데 무척 감동함. 한번은 형이 고교 시절의 시험 기간에도 시험 공부는 않고 열심히 소설책만 읽을 때 어머니가 들어오면 형은 얼른 소설책을 책상 밑에 내려 놓고 시험공부하는 척, 술수를 쓰곤 했다. 이런 형님 밑에서 그는 문학에의 호기심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이태원초등교 5, 6학년 시절, 담임 李相寶 선생님의 영향을 크게 받다. 당시 이 분은 젊은 총각선생으로 학교 후문 쪽에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하셨다. 어쩌다 선생님 방에 들를 때면, 책시렁도 없이 수많은 책을 방 한 구석에 쌓아놓고 항상 공부하셔서 ‘학문의 맛이 과연 어떤 걸까’ 하는 호기심도 갖는다. 더욱이 선생은 당시 한글 연구에 열중하셨고 학술 단체에도 열심히 다니셨다. 6·25 이후 정신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한 뒤,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셨는데, 그가 초등 시절에 보아 온 선생의 학구열에서 이미 짐작한 바였다. 그 후 시인이 대학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이 선생은 그에게 훌륭한 스승상으로 귀감이 된다. 경희대 시절엔 김진수·김광섭·황순원·조병화 선생 등 문학인들의 명성을 따라 튼실한 문학 토양을 스스로 다진다. 이어서 유창동·서정범 선생님으로 이어지는 스승들과도 귀한 인간적 교감이 많았다. 다만 ’73년부터 문단의 교류가 전무했다는 고백. <月評> 등의 원칙은 정실 비평을 사양하고 지방 시인/동인지를 자주 소개하는 편.

·가족 소개:그의 나이 33살 때 친구 소개로 23살의 처녀 元惠旭과 결혼. 슬하에 이대 불문과를 나온 선해(28세)와 경희대 일문과 출신의 유정(26세)이 있다. 선해는 현재 골드만 싹스 증권회사에 근무하고(6월경에 결혼한다니 눈독 들이지 말 것), 유정은 미국 이모 집에서 몽고메리칼리지를 다니며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고 있다(공부하는 예비 신랑이 물론 있음). 어린 시절의 유정은 감성이 풍부했다나. 초등 1학년 학예회 연습 때 한쪽에서 우는 유정을 교장선생이 보시곤 까닭을 묻자 겨우 울음을 그친 아이 입에서 나온 말, 아픈 외할머니 때문이라는 갸륵한 일화. 학교에서 한동안 화제였다고.



문학적 연보

·1958 자유신문사 신춘문예에 <音聲> 당선(심사:미당 서정주)

·1962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皇帝와 나> 당선(심사:박두진 박남수)

       공보부 주최 제1회 신인예술상 수상(심사:박목월 등)

·1963 신춘시 동인

·1966 四季 동인/3집까지 출간(동인:김주연 김현 김화영 박이도 정현종 황동규 등)

·1968 제1시집 《회상의 숲》(삼애사)

       제2시집 《북향》(예문관)

·1975 제3시집 《폭설》(동화출판공사)

·1980 제4시집 《바람의 손끝이 되어》(도서출판 문촌)

·1981 제4시집을 문학예술사에서 재출간

·1983 제5시집 《불꽃놀이》(문학과지성사)

·1984 제5시집으로 크리스찬 문인협회상 수상

·1985 제1시선집 《빛의 형상》(영언문화사)

·1987 시론집 《한국 현대시와 기독교》(종로서적)

·1988 제2시선집 《순결을 위하여》(문학사상사)

       제6시집 《안개주의보》(현대문학사)

       제3시선집 《침묵으로 일어나》(종로서적)

·1991 제7시집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창작과비평사)

       이 시집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3 수필집 《선비는 갓을 벗지 않는다》(서울창작)

·1994 제8시집 《약속의 땅》(자전적 일대기/시와시학사)

       시론집 《한국 현대시와 기독교》(증보판)을 예전사에서 재출간

·1995 제8시집으로 편운문학상/기독교 문화대상 수상



박 시인에 대해 평론가 하현식은 <어둠과 밝음의 변증법>이란 글에서 박 시인이 초창기 ‘관념’에서 ‘이미지’로 변신했으며, ’60년대 박이도의 시적 세계를 통해 신이 융합된 기독교시의 활착을 가져왔다고 전한다. 시인은 지금 그 종교라는 곳간에서 새로운 활강 연습 중이라고. 문득 옳다는 생각이지만 나는 한 가지 의심을 품는다. 과연 종교 공간(=곳간)이란 무엇인가. 시인에게 종교란 무슨 존재일까. 기착지인가, 종착지인가, 안착지인가. 나는 이 의문부호 앞에서 숱하게 우물거린다. 종교와 문학 사이에서 시인은 신성한 동일 공간을 만나게 된다. 시적 사유는 그럴수록 자유분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이 신앙심으로 사물을 만날 수 있지만 반드시 성스러운 존재가 되라는 법은 없다. 왜 기도시는 한결같이 구태의연한가. 꼭 ‘성 삼위일체’를 찾아야 하는지. 그렇다면 기도문으로 만족하는 게 마땅하며 굳이 ‘시’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사실 구약 <시편>만한 멋진 기독시를 나는 여직 만나지 못했다… 흉내만 있지 창의가 없다. 종교시는 이게 정말 문제다.

종교가 또한 지친 몸을 단순히 의탁하는 도피처가 돼서도 안 된다. 기독 시인들도 공통적으로 꼭 반성할 일이다. 물론 수장격인 박이도 시인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 절대적 존재일수록 그 권위에 진정성으로 신성하게 도전하는 자세가 절대적임을 나는 금석맹약金石盟約처럼 여긴다. 실은 이것이 나의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어쩔꺼나.



젊은 시인들에게

이 부분에서 박이도는 특히 애써 말한다. 신인들의 작품은 대체로 언어의 남용이 빚는 비시적非詩的 구문을 즐겨 쓴다는 사실이다. 자신만의 시어나 표현법 따위를 지니게 될 때 개성있는 시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고 주문한다. 30대 전후의 시인들 일부는 서툰 번역문투가 횡행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시어에 대한 취사선택의 고민이 전연 보이지 않는 점도 지적한다. 특히 《계축일기》《인현왕후전》《난중일기》 등의 우리 고전을 읽자는 부탁도 있다. 좋은 시란 실상 혼의 소리가 아닌가…

그는 철저히 예술 자체를 옹호하는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성’에 문학적 의의를 두고자 한다. 시에 어떤 목적적 수단이 의도되는 것을 예술적으로 정결치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상업성을 의식하거나 시를 방법론상의 의도적 실험마저 곱게 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시의 순수성에 대한 결벽증같은 것이라 할까. 그는 시가 언어예술이란 점에서 동서양의 언어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쏘슈르 이후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철학적 인식의 차원이 다양한 이론에 보다 가까이 접근, 언어 예술과의 효과적인 접술接術 방법은 없을까. 이런 궁리는 결과적으로 언어가 시라는 형식에 담겨 어떤 힘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의 발로다. 그의 시 분석 방법론은 ‘언어의 주술적 힘에 대한 연결고리 찾기’인데 퇴계·율곡 선생도 생각이 곧 언어라는,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고의 일단을 보이지 않았는지. 시인은 하나의 문학이론이 3년을 넘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진 바, 우리 문학인들이 주체적 비평 감각과 우리식 이론을 창출하자고 거듭 제안하고 있다.

그의 평문 <현대시의 활성화를 위하여>(《한국현대시와 기독교》, 예전사, 1994)는 우리에게 많은 내용을 시사한다. 그는 우리 시단의 문제점으로 ‘소재의 영세성’ ‘실험정신의 결핍’ ‘개인 의식의 회복 지체’ ‘시적 허위 위식’ 등을 꼽았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시대 양심과 시적 정의에 따른 신념을 갖는 시인에게 돌려드릴 항목이 있다. 혹시 자작시에 나타난 다양한 소재의 편력과 실험정신의 확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평론가 전영태는 ‘절제와 인내, 경건의 시세계’를 그린 것으로, 이숭원은 ‘회상의 편력과 자신의 존재 탐구를 위한 노력, 그리고 인간사랑·생명사랑 정신’으로, 신규호는 ‘신앙 체험의 예술적 승화’로 박이도의 시를 정리한 바 있다. 평론가 김병익·김주연의 경우, 시인의 선량함과 때묻지 않음을 고백한 평문을 보면, 시인의 작품에서 그 불편한(?) 정직성이 일종의 저항으로 때로는 결벽으로 자리하고 있음이 충분히 증빙되고도 남는다.

김대중 대통령의 거침없는 감동 어린 취임사를 눈에 담으며 나는 쉴새없이 키를 두드린다. 누가 이 민족에게 이런 국가를 주셨는가, 누가 이런 민족을 주셨는가, 누가 이런 문화 민족을 우리 내부에 심으셨는가. 감동의 격정시대가 도래할 게 아닌가. 오, 내 나라여. 나는 가만히 15대 국민의 정부 앞날을 위해 간구한다. DJ가 입신하기까지의 단련은 ‘마磨’의 수석과 같지 않았을까. 기도 드린다.

슬며시 눈을 감는다. 인생의 60이 갖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우린 모두 그러한 삶의 의미를 찾고는 있는 걸까. 그리 찾아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기독시인基督詩人 박이도, 차라리 나는 박 시인에게 21세기의 철저한 청교도주의자이길 원한다. 기독시인으로서의 박이도의 연보(시세계)를 섭렵한 것도 그 까닭이다. 아니면, 차라리 현대인이 아닌 철저한 현실인現實人이 되시라. 현실과 종교에 안주하거나 스스로 소외시킬 게 아니고 이제부터 오직 한 가지에 미칠 일이다.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삶의 선상에서 인간 박이도를 생각한다,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그의 작품에 또다른 변화가 있기를. 다시 자기만의 새 작품에 미치는 시인이 되기를―. 나는 그만 야릇/몽롱한 상념에 빠진다. …다시금 박이도 시인의 갑년을 축복 드리면서 샬롬. 오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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