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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수묵화로 그린 예수님.....

2004.06.02 04:37

폭우 조회 수:1692 추천:18






우연히 인터넷에서 인연이 되언 만난 한국화가 "문순"
한교회의 성실한 집사님이자 고등부를 가르치는 교사인 그분의 카페에 들렀다가
그분이 건네는 인사에 화들짝놀랐습니다.
그리곤 몇차례 더 인사를 건넸고
그분의 그림에 깊이 빠지고 있습니다.

그리 잘알지 못하는 그림이지만
그분의 그림 가운데 오롯이 나를 향하는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분이 있구나
감사하고있습니다.

기회가 닫는다면
꼭한번 전시회를 가고싶습니다.
자주 찾아가지도 잘 알지도 못하지만
간혹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동역자입니다.

다음 쉬는 날엔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아내랑 가봐야겠습니다.
그분의 작품 몇점이 있다는 교회에 들러볼 요량입니다.


그분의 카페와 안동교회 겔러리에서 글과 그림을 퍼왔습니다.



                               예수님을 그리며

                                                                        한국화가  문    순


이 글을 쓰기에는 많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 속에 존재하는 본래적인 이기심들이 교만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여지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그리는데, 그림보다 글은 훨씬 구체적이라 나의 자랑들이 함께 섞여져 나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가 그림을 그릴 때 도와주시고, 함께 해 주셨던 예수님을 의지하며 이 글을 쓰고자 합니다.

¶ 제가 예수님을 그리는 것은 제게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제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가장 자연스런 소재는, 내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생각하는 것, 늘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나의 이야기들이 형태를 가지고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 그래서 관객을 만나고, 감정의 교류가 생기고, 공감대가 형성되고… 문화가 정착이 되어간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내적인 필요를 통해 밖으로 분출되는 여러가지 소재 중, 저는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나의 소재로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습니다.

잠시 한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그림으로 첫 번째의 전시를 하는 중에 한 교수님께서 제게 하신 질문입니다.

"문순아, 나는 예수님을 그리려고 2년간을 붓을 꺽고 성화만을 그렸단다. 그런데 결국 성화 그리는 데에 실패를 하고 지금의 그림들을 그리는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성화를 그릴 수가 있었니?"

당시 대학교에서 전도사님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열심이셨던 교수님이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아주 쉽게 그 차이를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한번도 성화라는 느낌이나 생각을 가지고 그리지 않았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나와 가장 친한 친구, 그래서 정말 편하게 전혀 어려움이 없이, 오히려 더욱 쉽게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사실입니다. 더 이상의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저의 이 생각은 변함없이 확고하지요. 예수님은 언제나 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십니다. 때로 제가 너무 좋은 느낌에 그분을 높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는 하나, 그분 스스로 높임 받기를 원하시거나, 요구하신 적은 전혀 없지요, 본래 그분의 모습은 나와 동일한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나의 부족함을 도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철저히 겸손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제가 깨닫습니다.  

¶자연스런 만남은 성장을 이루어갔습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이 저의 묵상과 기도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늘 기쁘게 그려졌던 예수님의 모습들은 언제나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저의 마음과 생각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림으로만 예수님을 그리고…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연스럽게 저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새로운 모습들로 나 자신을 가꾸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아 가고자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드리기에 저는 몹시 부끄럽고, 또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그리며 또한 기뻐하지만, 그 안에서 제가 만나는 제 자신의 모습은 슬픈 모습들로 더 많이 발견됨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나 내 안에서 발견되는 나의 슬픈 모습들은 오히려 제게 은혜의 그릇으로 연결되어 나를 더욱 살찌게 하였습니다. 슬픈 데서 오히려 기뻐지는 깨달음, 그 깨달음이 더 큰 은총이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들이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제 그림 속에 용해되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림으로 그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이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나타나 보여졌던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해 94년 가을, 그 때의 심정으로는 누구나 붙잡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부탁(?)까지 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였습니다. '늘 내 속에서 떠나지 않는 예수님의 생각들로 나는 이렇게 기쁘고 좋은데…' 하는 생각에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마음이었습니다. 문득 호주머니에서 만원 지폐가 나왔는데 저절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거라도 드려서 예수님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옛날 선교사들이 온갖 초콜릿과 사탕, 껌이나 기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주면서 교회에 나오기를 원했구나… 그러나 그건 아니지, 조건 붙은 믿음의 시작은 주님의 원하심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알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은데… 만원이 문제가 아니구나, 내 것으로 전하자, 나에게 허락하신 나의 달란트, 그림으로 전하자.'

이 마음들이 늘 제 안에서 지내다가 기도로 연결되었습니다.

"주님,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언제나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던 주님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구하였을 때 주셨으며, 원함이 아니어도 미리 아시고 주셨던 주님이 저의 그림 속에 표현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저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제게 주셨던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의 마음들이 안타까움으로, 간절함으로 드러나게 하소서. 나의 부족함을 메꾸시고, 주님의 솜씨로 내 화판에 그리소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큰그림을 원하시면 클릭 하십시오
  
다음 해인 95년에 이 마음들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겨져 나왔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정말 다, 모든 것을 다 주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새벽녘에 완성이 된 그림입니다.

¶ 언제나 그림 앞에 서면 제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나 발가벗은 모습들이 발견 될 때, 그때 작가로서는 다행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정직할 수 있었던 그림이니까요.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  한번은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의 예수님 첫 번째 그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그림의 포스터를 가지게 된 한 분께서 미국에 건너가 어느 기독인이신 선생님께 선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께 그 그림의 포스터를 드리고, 저에 대해 설명을 드리려는데…

"아니요, 됐습니다.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이 그림에 작가의 마음들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군요. 특히 이 예수님의 눈매에 다 보입니다. 됐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정말 좋은 그림들을 대하면 작가의 마음들이 발견됩니다. 마네의 그림을 대하면 작가가 얼마나 색에 대하여 깊은 애정과 남다른 표현의 욕구를 가졌는 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고호의 경우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절절한 표현의 욕구, 그러나 함께 뒷받침이 되지 못했던 그의 형편에서 오는 절망감들이 그를 얼마나 짓눌렀는가가 그의 그림 속에는 다 녹아져 있습니다. 그의 텃치 속에, 그의 강렬한 색채 속에….

그림이란 욕구의 분출과정입니다. 무엇을 소재로 하던 그 화폭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제가 부족하나마 예수님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인간에 대한 사랑, 십자가의 사랑으로 대변되는 그 완전한 사랑, 바로 제가 닮아가고 싶은 사랑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그림은 제 기도의 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인간을 향하여 가장 보여주고 싶은 당신의 모습을 나의 그림 속에 나타내 보여 주시라고 언제나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마음의 간절함인데, 늘 그분께 열어 놓습니다.

늘 내 마음의 간절함이 그분의 지배 아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때문에 찾아오는 기쁨과 슬픔은 모두가 저의 행복입니다. 감정상의 변화는 중요하지 않고 늘 그분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가 제 관심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 안에 있어 그분과 교류하며 동행하는 모습들이 제 그림 속에 드러나 보여지기를 소원합니다. 어디에선가 저는 저의 그림을 향하여 눈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의 해석을 간절함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간절함, 저의 인간적인 소박한 소망이 수묵이라는 매체를 통해 함께 녹아져 내린 그림-예수님의 그림입니다.

¶ 그런데 왜 수묵(水墨)만을 고집하느냐고 제게 물어 보시는 분이 많아서 여기에 그 이유를 적고자 합니다. 수묵은 동양회화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어 왔으며 동양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수묵의 번짐과 스며듦은 회화의 근본을 이루는 자연스러움을 가장 잘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서양회화에서는 찾기 힘든 회화적 표현법입니다. 동양의 경우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중용과 조화를 강조하는 반면, 서양의 회화는 자연을 한 대상으로 보고 인간과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회화도 이런 근본적인 사고들과 무관하지 않고 정신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동양의 정신성과 자연스러움을 이상으로 삼고,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한지(韓紙)만을 고집하였습니다. 화선지는 중국의 종이이고 한국에는 한국적인 특성의 한지가 있습니다. 조금은 투박하고 덜 매끄러우며 번짐이 예민하지 못한 한지가 저는 참 좋습니다. 먹을 그대로 다 포용하지는 못하고 약간 거칠어 수묵과 한지의 합일이 덜 이루어지기는 하나  역설적으로 그 부분이 더욱 한국적이고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그렇게 흰색을 이 민족에게서 떼어내려 해도 불가능했다는 백의의 민족성이 저는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수묵과 한지의 고집은 이 민족에 대한 애정이며, 그곳에 길들여져 살아온 우리들의 자연스런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제 그림을 보고 가장 많이 사실과 다르게 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거의 99% 아니 100% 저를 모르시는 분들께서는 제 그림이 남자의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강하다 라는 이유에서인데, 그만큼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속마음들이 하나하나의 그림을 그릴 때마다 강렬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강렬함은 간절함이고 애통하는 마음들이며 안타까움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 그림을 보며 한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군요, 그림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저 분께서 저를 붙잡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아요. 나는 믿지도 않는데 나를 보시며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눈이 너무 강해서…"    


또 한번은 승복을 입은 한 여승이 전시 중에 찾아와 예수님의 포스터를 사겠다고 하여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왜 사실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눈매가 좋아서요, 너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이 눈동자에 다 있어서…"

눈매에 이끌려서 찾아온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눈매의 강렬함에 이끌려 제 전시장의 그림들을 찾아 왔습니다.

한 번은 또 어떤 여자분께서 오셨다가 그 다음날에 다른 외국인들을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한참을 너무 열심히 보고 있길래 감상을 여쭈었더니 계속 "Strong! Strong!…Strong!!……" 하였습니다. 그렇게 강한가? 그러나 제가 스스로 강함을 느끼고 임한 작업이라면 이렇게 강하게 마무리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강함조차 자연스러움의 결과이어야 하니까요. 내 속에서의 강렬함이 자연 표출된 그림인가 봅니다.

¶또 하나, 제가 받는 질문은 예수님만 그리지 왜 할머니나 소, 어린이와 흑인들이 등장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게 질문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좋다고 이야기해 주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꼭 물어보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넘쳐남이 아닌 가난한 자들의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무언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들에게 생수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진솔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사랑들을 쏟아 내었던 분들도 그림으로 옮겨 보았습니다. 따라가진 못해도 그분들을 본받고 싶은 마음을 담아내었습니다. 그리면서 나의 그림에 대한 회의도 생깁니다. 너무 교과서적이지 않는가 하는 마음들. 그러나 유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내게 나름대로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기쁘게 마음먹고 그려냅니다.


한 분이 제게 기쁨을 주셨는데 "분명한 메세지가 있고, 힘이 있고, 그래서 참 좋습니다" 라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니, 만나는 사람들이 다 천사 같습니다. 예수님을 그리면서 여러 가지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며, 동시에 만나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처럼 보여지는 놀라운 기적 같은 시각의 변화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는데… 이제 나는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께 하듯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가 예수님을 그리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예수님께서 내 그림 속에 기쁘게 계시지 않겠는가, 그분들을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조건은 그분들을 향하여 내가 갖는 마음들이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제 스스로 기쁘게 갈고 닦은 마음들이 편안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으로 그림 속에 담겨져 나올 때 저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제게 있어 예수님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고 함께 더불어 해석되는 '하나가 되는 참 사랑의 모습'으로 보인답니다. 신학적 차원의 맞고 틀림이 아니고, 제 개인 신앙에서 느끼게 되는 다른 차원에서의 해석입니다.  

소의 그림 역시 정신대 할머니들의 아픔, 이 민족의 아픔들을, 가장 한국적인 동물, 가장 이 민족과 친근한 소를 통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기독인으로 바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나타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림이란 내적 이유의 소산인 것이지요.

¶사실 저는 예수님의 팔복 가운데 애통하는 자로서의 복을 저의 그림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발견하고 체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엄격함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관대하게 대하고자 노력합니다. 어느새 변화된 제 자신의 모습인지 알 수 없지만 기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사셨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는 가장 열린 마음으로 언제나 사랑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러한 실천을 통해 모범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안타까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랑의 계산이 아닙니다. 무상으로 베푸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좁은 문임을 깨닫고,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별로 없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본래적인 이기심을 부인하는 삶의 길임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예수님을 그리며 저는 꿈을 꿉니다. 믿음의 꿈, 소망의 꿈,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밝은 미래들을 제 속에 간직한 채 꿈을 꿉니다. 꿈꾸는 자들은 그 꿈을 이루겠지요? 꿈꾸는 자들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앞을 보며,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날아오르기 위해 비상의 나래들을 늘 살피고 점검할 것입니다.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몫이며 그 꿈의 순수성이 바래지지 않게 늘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리의 순수한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합당한 열매가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중 하나인데 그것은 언제나 제게 새로운 도전의 말씀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가장 하나님 중심으로의 삶을 요구하는 성구라고 생각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 제 그림 속에 담아져 그 그림을 보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고, 나누어지며, 온 마음들에 퍼져나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이루어지는 참 기쁨의 나라가 이 땅위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제 그림의 작업을 쉬지 않고 일구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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