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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역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

2004.06.17 01:11

폭우 조회 수:7894 추천:56

역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
                                              
1. 들어가며
우리가 흔히 쓰는 역사관 또는 사관이란 말은 어디서 왔는가?  
이 말은 중국 사학사에서 유래하지 않고 역시 우리의 대부분의 용어가 그러한 바와 같이 일본 학계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유래가 어디에 있든 간에 일본 식자들간에는 아마 유물사관이란 개념이 사용되면서부터 사관이란 말이 본격적인 학술용어로 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경우 사관은 역사에 대한 견해, 해석, 관념, 사상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어쨋든 이 말을, 2차대전 후에는 우리도 즐겨 쓰는 실정이며 오늘날 우리 나라 학계나 일반인들이 사관이란 말로써 역사철학 또는 역사이론까지 포함시켜 뜻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막연히 '역사를 보는 눈' 혹은 '역사에 대한 식견' 혹은 '역사의식' 이란 광범한 의미로 사용하게 되어 독자적인 역사 개념으로 성립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사관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시간에 대한 강한 자각 즉 사회와 문화의 변화와 발전을 시간적 전후 관계에 따라 인식하는 경우 비로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경우 사물의 생성 소멸을 시간적 차원에서 뚜렷이 의식한 유태, 크리스트교 세계에 사관의 기원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표현은 중세의 교부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래로 여러 유형의 사관이 많은 사상가들, 역사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한편으로는 역사과정을 국가 성쇠의 반복이라 본 마키아벨리의 사관, 순류와 역류의 교체과정으로 역사 발전을 본 비코의 나선형적 주기사관, 역사를 이성의 발전 과정으로 본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문화의 생성 소멸을 유기체적 생태에 비유한 슈펭글러나 토인비의 사관 등이 열거 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주제가 정치에 있지 않고 사상, 예술, 문화 등 광범위한 인간 활동 분야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부르크하르크의 문화사관, 역사의 특성이 개별성과 발전에 있다고 본 역사주의사관 또는 역사 해석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베커와 베어드의 상대주의사관 등이 있다.

위에 열거한 사관들을 대별해 보면 첫째 목적론적 사관 즉 역사 세계의 의미, 목표, 가치등을 사변적으로 논한 역사철학, 둘째 역사 법칙론으로서의 사관 즉 역사 세계의 변화, 발전이 일정한 패턴이나 단계를 거치는 법칙성을 설명하려는 체계적인 논리, 셋째 사학 이론으로서의 사관 즉 역사 지식의 객관성과 주관성, 역사 방법론 혹은 역사 설명의 본질을 분석하는 철학적 사고 등으로 분류된다.

사관의 개념, 그 타당성과 유용성에 관해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 물고 일어날 수 있겠다. 우리는 간단히 쉽사리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최종적인 확답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의문의 제기 자체가 어떤 사관이 형이상학적 기반이 튼튼한가 헉은 어떤 사관이 사실적 입증을 소홀히 하고 있으며 객관적 타당성이 약한가를 판별시켜 주는 비판적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역사학계와 일반인들 간에 흔히 사용되고 있는 이 개념의 의미와 그 한계를 캐묻는다면 역사 사고에 다소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목적론적 역사철학으로서의 사관
랑케가 그의 역사 이론의 강론에서 내세운 주요 논제의 하나는 철학에 대항하여 역사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최고의 이념'을 논하는 피히테, 헤겔의 철학과의 투쟁을 선언 하면서 '사변에 의해 그 결과를 얻어 역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그런 형의 철학' 이라고 자기의 비판대상을 규정하였다. 사실상 랑케는 당시 독일 관념 철학만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본질을 선험적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역사 철학을 모두 거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변적 역사철학은 아마 사관의 명칭에 가장 합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흔히 역사철학이라 한다면 이러한 사변적이며 개괄적인 역사철학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역사철학은 첫째로 역사 과정의 일반성 또는 사건 전대의 전과정에 내재하는 의미 또는 의의를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일반성, 의미, 의의 등은 통상적인 역사 연구 작업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며 선험적인 것이라 주장되고 있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며 인류역사는 단순히 연대순에 따른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 만으로서는 충분치 않고 그것을 넘어서 합리적 체계와 질서에 대한 직관적 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역사 철학자들은 대체로 역사 과정의 필연성을 믿고 있는 것 같다. 즉 대부분의 경우 역사 발전 과정은 도식적인 확정적 단계를 거쳐 전개된다는 것이다. 비코나 헤겔의 사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단계적 발전을 개별적인 역사 사실보다 더 광범위한 관련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거기에는 역사를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개괄적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로 역사철학은 목적론적이다. 목적론 사관에 의하면 세계사는 하나의 전체로서 미래 계획이나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 이유 때문에 역사 발전 과정이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견해이다. 예컨대 칸트는 '자연의 숨은 계획'을 발견할 수 있는 보편사의 원리를 내세우려 고 했으며 맑스는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해 움직이는 역사의 목표를 역설하였다.

목적론적 역사 철학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 역사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어디로 향해 가는가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변화, 발전 방식 또는 진보의 개념이다. 서양사의 경우 최초의 명확한 목적론적 사관은 크리스트교에서 나왔다. 역사는 교제라는 하나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전개되는 통일된 전체인 것이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시간적 연속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관념을 뚜렷한 역사에의 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전형적인 크리스트교의 관념은 뚜렷한 역사에의 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전형적인 크리스트교 사관이 표현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는 인류의 통일성과 신극을 향한 발전이 곧 역사 과정에 구현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신국과 지상과의 대립 투쟁에 대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천국의 승리가 교시를 통해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목적론적 사관은 17세기 이래로 계속되었으며 이 경우 특히 인간의 완성과 인류 문명의 진보가 논의되었다. 비코는 아마 근대적 의미의 역사주의 사관을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라 생각된다. 그는 역사가 인간이 만드는 것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에 의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비코에 의하면 목적론적 원리는 역사에 내재해 있으며 그것으로써 각 시기의 특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과학>에서 역사의 전과정이 반복, 누전적인 문화적 성장과 소멸이란 패턴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비코의 사관은 그후 헤르더, 칸트, 헤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비코, 헤르더, 특히 칸트가 세운 사관 위에 헤겔은 매우 대담한 역사철학을 수립하였다. 그는 <법의 철학> 및 사후 출판된 <역사철학강의>의 서론에서 역사가 절대사인 정신의 자기 실현 과정이며 정신의 본질이 자유이기 때문에 역사의 목표는 잠재적 자유를 변증법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류 역사가 자유라는 이성적 개념을 점진적으로 전개하는 제단계를 입증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사의 단계를 1)단지 한 사람만이 자유인 동방세계 2)몇몇 사람들이 자유인 그리스, 로마의 세계 3)모든 사람이 자유인 게르만 세계로 전개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자유는 특정한 민족과 사회에 특유한 법적, 정치적, 종교적인 제도에서 구체적인 실현을 본다는 것이다.

끝으로 진보라는 관념이 정해진 목표에 귀착함을 의미한 헤겔의 목적론적 사관은 계몽 사상시대의 직선적 진보관과 달리 차라리 비코적인 순환 사관에 접근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필연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3. 역사 법칙으로서의 사관
법칙 사관의 가제의 하나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한 역사 발전의 패턴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패턴에는 직선적 패턴과 순환적 패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 철학자들은 이 어느 한쪽을 소박하게 취하는 대신 복합적 견해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비코의 나선형적 발전 사관은 직선적 진보를 주장하면서도 순류와 역류를 논하고 있기 때문에 순환 사관에 가깝다. 비코는 또한 특정 민족 또는 국가가 필연적으로 거치는 역사 단계 예컨대 영웅적 야만 시대, 문명 시대, 퇴폐적인 신 야만시대 등의 단계를 거치는 순환을 주장하였다.

역사 변화의 폐턴은 인간 사회의 꾸준한 전진을 믿는 진보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술한 바와 같이 일찍이 계몽 사상가들은 인류 사회의 직선적 진보와 인간 완성을 확신하였다. 그후 19세기에서도 콩트는 과학적 단계에 이르는 사회적 발전을 말하고 밀은 진보의 법칙에 따라 미래의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반합의 원리간의 충돌로서 변증법적으로 전진 운동이 일어난다고 한 헤겔의 역사관에 영향받은 맑스는 이러한 전진 운동의 궁극적인 원인이 인간의 물질적 생존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의 기술적 발전은 경제적 계급간의 충돌을 일으켜 마침내 탄압 받은 계급이 지배하여 새로운 사회 계량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과정의 종점이 계급 없는 사회이며 이러한 궁극적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라 강조했다.

맑스의 사관에 비해 슈펭글러나 토인비의 사관은 유기체적인 문화 형태론에 입각하고 있다. 사회의 유기체적생체 비유는 그 기원이 오래되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하였으나 역사관에 적용시키기는 헤르더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에서 인류 문화가 '유기적' 통일체임을 강조하고 각 문화의 '정신'은 인류의 전반적 발전을 위해 독자적 공헌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슈펭글러는 <서방의 몰락>을 통해서 단일한 직선적인 역사 발전을 거부하고 여러 문화권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의 진화와 같이 성장과 소멸의 길을 걸어가며 그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독일의 1차 세계대전에 패망하는 해인 1918면에 첫권을 낸 슈뱅글러는 사관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요구하면서 종래의 삼분법을 비판하였다. 역사철학은 '문화의 비교 형태학' 이며 그것은 문화의 생활 형태, 리듬, 법칙 등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슈펭글러에 의하면 문화는 통일적 관념을 갖는 어떤 집단의 모든 활동 즉 예술, 종교, 정치, 경제, 군사 등을 알려주는 일종의 정신적 형성물 이며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대한 독특한 관념 속에 표현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 문화 9개중 고전인은 구체적이며 현세적인 아폴론적 공간 표현, 현대 서방인은 무한히 뻗어 나가려는 확장에 대한 파우스트적 공간 감각, 이집트인은 1차원적 공간 감각, 러시아인은 평면적 감각, 아랍인은 신비적 공간 감각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펭글러의 사관의 특징은 역사를 생불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한 것이었다. 문화는 생물처럼 생활 주기를 갖고 있으며 나이 먹으면서 질적 변화를 하게 된다. 춘하추동의 사계에 비유하여 예컨대 서방 문명의 경우 봄인 중세 초기는 농업 시대로서 강력한 신비적 종교, 여름인 르네상스는 도시 대두의 시기로서 개성적인 예술가들의 출현, 가을인 18세기는 상공업의 전성과 중앙집권적 군주제의 시기로서 철학의 도전에 의한 종교의 후퇴, 겨울로 넘어가는 제국주의 시대로 대도시, 프로레탈리아 계급, 정치적 탄압, 불안한 전쟁의 시기로서 물질주의의 팽배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슈펭글러는 그의 문명 형태론이 법칙을 탐구하고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기본이라고 믿고 문화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기간을 약 천년으로 생각하여 각 문화의 역사적 생성을 예정하였다.

  토인비도 역시 문명을 생물체로 비유했으나 그가 <역사의 연구>에서 보인 방대한 데이터는 일찍이 사관을 주장한 사람들 중 그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토인비는 문명의 생성, 해체를 외적 조건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란 공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른바 제 1세대 문명이 물적 환경을 극복하는 예로써 계곡소태지였던  이집트 문명, 마야 문명의 열대 밀림, 미노스문명의 바다 등을 들었다. 물론 그는 이러한 도전에는 자연 조건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조건도 포함시켰는데 어쨋든 도전이 문명 발전에 공헌하기 위해서는 중용적이거나 최적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여 자신의 가설을 좀더 정확하게 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도전이 너무 지나치거나 부드러운 것이라면 그 문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유산된 문명의 예로써 아이슬랜드나 그린랜드의 격심한 자연 조건에 직면한 바이킹족의 경우 가 있다. 한편 문명이 중간에서 좌절된 경우 즉 정지된 문명은 폴리네시아족, 에스키모족, 스파르타족 등에서 예증되는데 그것들은 당초의 도전에는 성공했으나 그후의 계속적인 도전이 너무 심해서 사회의 정신적 자원은 고갈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맑스, 슈펭글러, 토인비 등의 사관을 살펴보았는데 이에 대한 결론으로서 이러한 법칙은 첫째 역사 발전의 패턴과 단계를 도식화하고 일정한 법칙을 끄집어내려 하며, 둘째 이른바 '과학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실 입증을 시도하며 이점에서 대부분의 목적론적 사관과 상이가 하다는 점들이 공통 특성인 것 같다.


4. 사학 이론으로서의 사관
사학 이론이라 함은 역사학의 본질, 역사 인식과 논리, 역사적 설명, 방법론 등에 대해 가해진 철학적 분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역사 연구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과관계는 무엇인가, 사실의 재구성은 순수 객관적일 수 있는가, 역사 설명은 과학적인가, 역사가는 가치 판단에 관련하는가 등의 문제가 거기에서 거론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분야는 분석적 역사철학 또는 비판적 역사철학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사학 이론은 서술한 사관의 경우와 달리 많은 직업적 역사가들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일 것이다.일찍이 철학을 역사에서 배제코자 한 랑케나 브르크하르트는 이러한 의리의 역사철학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로빈슨, 크로체, 베커, 베어드 등 역사가들의 사관은 역사학의 본질 뿐 아니라 역사 연구의 방법론에까지 연결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랑케의 '일어나 그대로' 라든지 부르크하르트의 '반복하는 것, 일정한 것, 유형적인 것'의 주요 부분 및 역사 서술의 기본 태도를 밝힌 것이다.


5. 나가며

이제 우리는 사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도달하였다. 사관은 부정적인  면과 함께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오늘날 전문적 분화 및 개별 연구의 경향이 커져 가는 현황에 비추어 사관이나 역사철학은 역사가의 시야를 넓혀 주며 그가 수행하는 특수연구가 보편사와 어떠한 연관이 있음을 깨우쳐 줄 것이다.

피렌은 보편사의 개념은 적어도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개별사는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보편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배라클러프도 역시 솔직하게 이야기한 바와 같이 비록 역사가들이 실제로는 역사의 몇몇 단편적 부분밖에 다루지 않았지만 사실은 항상 '보편사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들이 보편사적 관심을 갖는다 해서 반드시 철학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사관을 세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보편사란 원래 역사가의 문제이며 그것은 추상적인 사변으로부터 경험론적 차원으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