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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想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

2004.06.24 03:41

폭우 조회 수:5282 추천:50

푸코의 데리다 논쟁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의 논쟁을 모르고는 진정 두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사르트르와 카뮈, 그리고 사르트르와 레이몽 아롱의 논쟁이 각기 두 사람들 간의 우정의 결별을 가져왔듯이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도 두 사람을 거의 10여년이나 서먹서먹한 관계로 갈라 놓았다.
50년대의 논쟁이 마르크시즘과 보수주의의 대립이라는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면 63년과 72년에 걸친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은 수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데카르트의 『성찰』이 광기를 포용했느냐 배제했느냐에 관한 미세하기 그지없는 자구 해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원 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푸코의 해석, 데리다의 반론, 다시 데리다에 대한 푸코의 재반론이라는 네 단계로 논의를 전개시키기로 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구로자와 아끼라(黑澤明)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구조와 비슷하다.
산길을 지나던 젊은 부부가 산적을 만나 여자는 강간당하고 남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사건 당사자인 세 사람의 진술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가 자꾸 반복되면서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사건의 의미가 숨막히는 긴장감을 야기시킨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 안에서의 사건은 실내복을 입고 불옆에 앉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데카르트이다.
그는 이전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지식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 지식의 기초인 모든 감각을 의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꿈과 착각에 의한 감각적 오류와 광기의 경우들을 하나씩 상정해 본다. 그리고는 "하지만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야. 내가 그들과 비슷하게 생각한다면 나도 미친사람이지."라고 말한다.


그후 3백여년이 지난 후 두 철학자가 이 말을 다시 검증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은 이 말이 광기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으로 본다. 사상 처음으로 광기의 배제가 이때 이루어졌고 따라서 17세기에 파리 인구 1%를 수용소에 가둔 역사적인 대감금의 책임이 데카르트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번째 철학자는, 글에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 말을 하던 순간 철학자의 앞에는 철학에 별로 조예가 깊지 않은 어떤 사람이 앉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 나도 미친 사람이지."라는 독백같은 말이 사실은 철학자의 회의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첫 번째의 철학자가 다시, 성찰은 혼자서 하는 것이므로 '다른 목소리'가 숨겨져 있다는 가설은 얼토당토 않다고 반박했다. 게다가 꿈에 대한 예화는 일상적인 것인 반면 광기에 대한 예화는 매우 일탈적인 것이어서 여기에 벌써 광기와 꿈 사이의 불균형, 비대칭이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철학자는 여기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첫 논쟁이 시작된지 30년 후 첫 번째 철학자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한 심포지엄에서 그는 선배 철학자에 대한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앞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데카르트가 아닌 프로이트를 대상으로 삼아서였다.


그러면 우선 데카르트의 『성찰』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데카르트의 『성찰』


데카르트는 자기가 믿고 있던 견해들을 해체하여 근본에서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하려는 순간에 이 글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참된 것인양 받아들여 왔고 또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쌓아 올린 것이 매우 의심스럽고 불확실할 수 밖에 없으므로 학문에 있어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들에서 벗어나 기초부터 새로이 출발할 것을 진지하게 시도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견해들을 일일이 의심해 볼 필요는 없었다.
그 견해들이 믿받침으로 삼고 있는 토대를 파괴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기초의 파괴는 건물의 나머지 전체의 파괴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우리의 인식, 우리의 앎의 중요한 토대 중의 하나인 감각을 의심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대부분 감각을 통해 얻지만 생각해 보면 감각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똑같은 크기의 도형도 검정색이 흰색보다 작아 보이고 똑같은 길이의 선도 화살표가 바깥쪽에 있는 것이 안쪽으로 있는 것보다 더 길어 보이지 않는가.
우리의 감각은 이처럼 우리를 속인다. 가끔 우리를 속인다면 항상 속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한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사람은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인 것처럼 감각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예컨대 2+3=5같은 비감각적 기원의 수학적 진리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믿을 수 없다.
감각이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경우를 하나씩 점검하는 과정에서 꿈과 광기가 등장한다.
두 가설이 반대 방향으로 나란히 간다는 의미에서 데리다는 이것을 쌍곡선(hyperbole, 과장법이라는 의미도 있음)이라고 하고, 푸코는 거기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소홀하게 취급되는 불균형을 본다.

데카르트가 성찰을 시작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확인에서부터이다.
실내복을 입고 종이를 손에 들고 불옆에 앉아있는 그는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이 손과 육체가 내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정신병자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담즙의 검은 김으로 뿌옇게 서려 있어 아주 가난한 주제에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며 벌거벗었는데 황금색이나 자주색 옷을 입었다고 믿고 있고, 자기 몸이 유리로 되었거나 아니면 자기가 항아리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처럼 생각한다면 나도 또한 미친 사람일 것이다"라고 그는 광기의 문제를 일단락 짓는다.
미치지 않은 이상 나는 내 몸과 내 주위의 현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잠을 자고 누구나 잠 속에서 흔히 꿈을 꾼다.
정신병자들이 깨어있을 때 머리에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을, 아니 그보다 더 해괴한 것을 꿈속에서 보는 일도 허다하다. 꿈속에서도 지금처럼 실내복을 입고 손에 종이를 들고 불옆에 앉아 이것이 현실이거니 생각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꿈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고 믿을 무슨 근거가 있는가?
장자의 나비의 꿈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나는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장자인가, 아니면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가? 이처럼 현실이 꿈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현실을 모두 불신해야 할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이 우위이며, 꿈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그 이유는 꿈의 질료가 현실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꿈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 사물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상상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상상이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지각했던 사물들이 허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현재 내앞에 있는 꽃다발을 눈으로 바라볼때 그것은 지각(知覺)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채 어제 본 꽃다발을 내 의식 앞에 떠올리면 그것이 바로 상상이다.
꿈도 마찬가지이다.
깨어있을 때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면 지각이지만 잠잘 때 허상으로 경치를 바라보면 그것이 꿈이다.
사르트르가 지각과 상상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도 지각과 꿈은 역시 비양립적이다. 여하튼 상상 속의 이미지 또는 꿈속의 이미지는 실재(實在)의 사물과 똑같은 것이다. 다만 실재의 사물이 크기와 수, 양과 모양, 그리고 연장(延長)이 실제의 장소에서 실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실제의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물체적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꿈속의 이미지나 상상 속의 이미지는 실체성이 없는 관념적 허상이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희랍 신화의 사이렌(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인 마녀)이나 사티로스(반은 사람 반은 짐승)같은 상상도 있고 샤갈이나 달리같은 화가들의 초현실적 상상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현실의 어떤 사물과 일치하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기상천외한 상상이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는 현실의 실재의 사물에서 따온 것들이다. 사이렌은 여자와 물고기라는 실체, 사티로스는 남자와 짐승이라는 실체를 각기 조합한 것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기괴한 상상의 그림도 사실은 우리의 눈이나 손 같은 요소들을 조합한 것이고 더 내려가 보면 삼각형, 사각형 같은 도형이나 빨강, 하양 같은 색깔들을 조합한 것이다.
현실을 아무리 해체한다 해도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요소는 아마도 이와같은 형태나 색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 사물"이다.
모든 실재의 사물 안에 들어있으므로 보편적이고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형태이므로 단순하다.
우리의 상상이나 꿈은 이런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들을 거의 무한정의 순열 조합을 통해 이리저리 결합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꿈은 이런 요소들을 조합하는 능력은 있으되 그 "단순하고 보편적인" 사물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없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현실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꿈은 그것을 그저 차용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꿈이 현실과 비슷하다 해서, 꿈을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현실은 꿈보다 우위에 있으며 꿈이라는 시련을 이겨냈다.

데카르트는 이처럼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을 얻기 위해 광기와 꿈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은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끌어냈다. 물리학이나 천문학, 의학 같은 복합적인 학문들을 불확실하다고 의심할 수는 있어도 대수학이나 기하학 같이 매우 단순하고 매우 일반적인 것들만을 취급하는 학문은 의심할 수 없다.
예컨대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라든가 사각형은 네 변 이상을 갖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리들이 거짓이라거나 불확실하다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것까지 의심해 보기 위해 데카르트는 심술궂은 악마의 허구를 만들어 낸다.

그는 원래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토록 철저한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자아의 본질을 정립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신은 궁극적으로 진리의 연원이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적일 수 없고 거짓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을 끌어내기 위해 모든 것을 짐짓 의심해 보는 과정에서 광기와 꿈의 시험을 마친 그는 이제 이성적으로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수학적 진리까지 의심해 보기 위해 심술궂은 악마를 등장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진리의 원천인 선량한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계교를 나를 속이는데 사용하는, 전능하리 만큼 교활하게 속임수를 쓰는 어떤 심술궂은 악마가 있다고 가정하려 한다.
하늘, 공기, 지구, 색채들, 형체들, 소리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모든 외적 물체들은 그 악마가 나의 믿음을 농락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환상과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손도, 눈도, 살도, 피도, 아무런 감각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믿는 것처럼 생각하려 한다."

이 허구의 에피소드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의식의 각성에 대한 다짐과 사유 주체로서의 자신감이다.
"비록 이런 방법을 통해 아무런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나의 이런 판단을 중단시키는 것은 나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정신을 이 큰 사기꾼의 모든 기교들에 대비하여 잘 준비시킴으로써 아무리 그가 전능하고 교활하다 할지라도 나에게 아무것도 강제로 부과시킬 수 없도록 할 것이다.
" 결국 그 어떤것도 사유 주체로서의 나를 손상시킬수 없다는 자신만만한 결론이다.

논쟁의 시작

푸코가 데카르트의 「제 1 성찰」을 문제 삼은 것은 총 673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광기의 역사』중 제 2 서문인 세 페이지(54-57)에 불과하다.
17세기에 파리 인구의 거의 1%를 수용소에 가둔 대대적인 감금의 선풍을 중세 프레스코화처럼 다채롭고 생생하게 묘사한 후 결국 그것이 이성에 바탕을 둔 권력의 전략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기념비적 저서에서 사실 이 세 페이지는 너무나 미미하고 부수적인 부분일 뿐이다.

철학을 모든 인식의 기초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철학에 반기를 들고 철학 그 자체보다는 차라리 모든 시대의 철학적 담론이 예속되어 있는 어떤 인식 형성의 조건과 규칙들에 더 관심이 많았던 푸코가 가장 교과서적 철학인 데카르트를 문제 삼았던 것이 실수였는지 모른다.
데리다에 대한 반론에서 고백했듯이 이것은 전통적 철학에 대한 일관된 경멸에도 불구하고 그가 벗어나지 못했던 학교 철학 교육의 완강한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나머지 670페이지의 엄청난 내용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일반 독자들은 별로 기억에도 남지 않을 이 짧은 데카르트의 텍스트 분석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 전체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푸코의 데카르트 읽기

푸코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회의의 과정에서 꿈과 모든 형태의 오류 옆에 광기를 놓는다.
꿈, 감각적 오류, 광기, 이 세 가지의 위험을 피하고 남는 진실이라면 정말로 믿어도 좋은 진실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배제하여 보편적 진실, 영속적 진실을 확립해 나아간다.
데카르트는 한쪽에 광기를 놓고 다른 한쪽에 꿈과 오류를 놓았는데, 그 사이에 불균형이 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꿈과 오류의 위험을 피해가는 방식이 광기의 위험을 피해가는 방식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감각적 오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감각이 아무리 우리를 잘 속인다 해도 그것은 "별로 감각적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왜곡시킬 뿐이다. 제아무리 그것이 우리에게 환각을 일으킨다 해도 그 환각의 힘은 언제나 진실의 한 잔재, 즉 "나는 여기에 실내복을 입고 벽난로 옆에 앉아 있다"라는 최소한의 진실을 남긴다. 따라서 감각적 오류는 별것이 아니다.

꿈에 대해 말해본다면, 꿈 속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꿈이 사실인 듯이 느껴진다 해도, 꿈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이 사실성이야말로 끝내 꿈도 훼손시키지 못하는 어떤 진실성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꿈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 어떤 사물들을 질료로 해서 조합된 이미지인데, 그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사물들은 꿈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이 만들어낸 현실 속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꿈이 현실인 듯이 보여도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 그것을 넘어서는 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처럼 꿈과 감각적 오류의 시험을 견디고 남는 것이 진실의 영속성이며 보편성이다. 이미지로 가득찬 꿈도, 감각이 속이는 의식도 이 진실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의심하게 할 수 없다.
"눈이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인정하자. 지금 우리가 잠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진실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푸코는 데카르트를 대신해 말한다.
그런데 광기의 문제에서는 데카르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광기의 위험이 진실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것은 광기가 사유 안에서 그것을 왜곡시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사유 자체가 광기를 배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의 육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는 자신이 유리의 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확고한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인이고, 내가 그들의 예를 따른다면 나도 그들처럼 미친 사람일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오류와 꿈의 경우에는 진실의 영속성이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제거하고 꿈에서 빠져 나오도록 해주었지만 그 진실의 영속성은 광기에 대해서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
우리를 광기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광인이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은 사유와 자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정립했듯이 여기서는 사유와 광기의 상호배제의 관계가 정립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심할 어떤 이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지금 꿈꾸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생각만으로도 우리가 미쳤다고 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광기는 바로 사유 불가능성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한쪽의 꿈과 오류 그리고 다른 한쪽의 광기 사이에 불균형이 있다고 한 푸코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꿈과 오류 그리고 광기가 진실과 맺는 관계 또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는 서로 비슷하지 않다.
꿈이나 환각은 진실 그 자체의 구조 안에서 극복된다. 그러나 광기는 회의하는 주체에 의해 배제된다.
꿈이나 오류가 사유의 대상과 관계가 있다면 광기는 사유하는 주체와 관계가 있다.
이와 같은 독법으로 제 1성찰의 텍스트를 읽고 난 후 푸코는 자신의 가설을 세운다.
16세기에 광기는 환각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꿈꾸지 않는다는 자신이 없었고 광인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자신이 광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는다.
광기는 더 이상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의 기획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이제 이성은 오류 이외의 다른 함정이나, 환각 이외의 다른 위험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충만한 자기 소유 안에 안전하게 피신해 들어갔다.
요컨대 그는 사유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의 이름으로 광기를 추방한다. 이렇게 해서 광기는 배제의 영역 안에 자리 잡았다.
16세기의 비이성(광기)은 일종의 공개된 위험이어서 그 위협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주관성과 진실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17세기에 이르러 데카르트적 회의의 도움으로 이 위험은 해소되었으며, 광기는 진실의 영역 밖에 놓여지게 되었다. 광기가 추방된 진실의 영역, 그것은 다름 아닌 이성 그 자체이다.
이때부터 광기는 이성의 반대항으로서 이성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성과 비-이성(광기) 사이에 분할선이 그어졌고 이 분할선은 르네상스 시대에 그토록 낯익었던 비이성적 이성 또는 이성적 비이성의 체험을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푸코의 가설은 "르네상스 시대에 비록 그 폭력성은 이미 제어되었지만 여하튼 마음대로 자기 목소리를 냈던 광기를 고전주의 시대는 이상한 폭력적 수단에 의해 침묵하게 만들 것이다." 라는 2장의 서문 첫째 줄에 이미 들어 있다.
광기를 침묵하게 만든 이상한 폭력적 수단, 그것이 다름아닌 이성이고 그 이성을 정립한 것이 데카르트였다는 것이 푸코의 결론이다.
결국 세 페이지에 불과한 이 서문은 결코 그냥 지나쳐도 좋을 만한 그런 미미한 부분이 아니었다.
이 가설이야말로 『광기의 역사』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떠받치고 있는 초석이 아닌가?
데리다는 과연 치명적인 급소를 찔렀으며 구조 전체의 붕괴를 초래할 기초를 건드렸다.
푸코가 왜 데리다에 대한 반론을 1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신중하게 준비했는지 그리고 그 후 왜 두 사람은 10년간이나 서로 만나지 않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데리다의 반박

데카르트에게서 꿈과 광기 사이의 불균형을 보았던 푸코와는 달리 데리다는 그 둘 사이의 완전한 대칭성을 본다.
그의 독특한 어법에 의하면 쌍곡선적 관계이다.
그의 데카르트 독법의 출발점은 푸코와 같다.
푸코처럼 그도 데카르트의 두 개의 추론방법을 나란히 비교한다.
그 첫째는 감각이 우리를 속이는 것은 "별로 감각적이지 않은" 것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것에 한정된다는 추론이다.
두 번째는 상상이나 꿈이 그것들의 구성요소인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들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추론이다.
데카르트는 감각과 꿈에 대한 분석에서 하나의 핵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 어떤 의심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단순하고도 연관적인 요소이다. 그러니까 푸코가 말했듯이 내가 의심을 '피하여' 확신의 영토를 재탈환하는 것은 감각적인 지각과 꿈 속에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푸코는 '데카르트는 꿈과 오류의 가능성을 피하듯이 광기의 위험을 피하지 않는다․․․'라거나 '회의의 구조 안에서 꿈과 오류 그리고 광기 사이에 불균형이 있다'라고 썼던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 어떤 순간에도 데카르트가 감각이나 상상적인 구성에 기원을 갖고 있는 모든 인식에 대해 전면적인 오류의 가능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고 본다.
꿈의 가설은 감각이 가끔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가설의 과격화 또는 쌍곡선적 과장법이라는 것이다.
꿈 속에서 내 감각적 이미지들은 전부가 가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환영에 불과하다고 의심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 끝내 의심할 수 없는 어떤 확신의 요소가 남는데 그것은 현실속의 우리 감각의 지각 작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꿈의 경우를 시험해보는 것은 감각적 오류 일반의 경우를 다루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에서 벗어나는, 따라서 감각적 오류나 상상 혹은 꿈의 조합에서 벗어나는 확실성과 진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비-감각적 기원 혹은 비-상상적 기원의 확실성과 진리이다. 다시 말해서 간단하고 관념적인 것이다. 내가 잠잘 때 꿈 속에서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가짜 환영'이고 우리가 깜박이는 눈동자, 우리가 움직이는 몸의 존재도 역시 그렇다.
꿈속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상들이 모두 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 표상들, 그 이미지들, 그 관념들은 모두 자유분방한 상상에 의해 우리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어떤 것을 그려낸 화가의 그림이나 마찬가지로 허구적이고 가짜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림의 경우에는 끝내 환영으로 해체되지 않는, 그러니까 화가가 자기 자의적으로 꾸며내지 않은 하나의 요소가 마지막으로 남는데 그것이 바로 색깔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의 그림 속에서 모든 것이 가짜고 환영이고 비현실이라고 사상(捨象)해 보아도 색채 만큼은 엄연히 실재적인 가장 단순한 어떤 요소로서 최종적으로 남는다.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괴한 이미지들의 꿈속의 표상들이 모두 가짜이고 허상이라는 것을 인정해도 결코 우리가 자의적으로 꾸미지 않은 단순한 어떤 부분이 남는다.

제 1성찰의 다음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화가들이 사이렌이나 사티로스를 나타내기 위해 괴상하고 특이한 형태에 의해서 온갖 인공적인 것을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나 본성을 부여할 수는 없고 오직 여러 다른 동물들의 신체 부분을 섞어서 종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들의 상상력이 아주 기괴하여 우리가 아직까지 그와 비슷한 것을 본 일이 없는 그러한 전혀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고 하여도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작품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꾸며지고 절대적으로 사실적이지 않은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여도 적어도 그들이 사용한 색채들은 사실상의 색채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유로 비록 눈이나 머리, 손 및 이와 비슷한 것들이 상상의 물체일 수 있다 하여도 거기에는 좀더 단순하고 좀더 보편적이며 참되고 현존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된다.
색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요소들의 혼합이, 참되고 실재적이건 아니면 꾸며지고 환상적인 것이건 여하튼 우리의 생각 속에 남아있는 그 모든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물체적 본성 일반 및 그 연장(延長) 그리고 연장(延長)을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모양, 이것들의 양(量), 즉 이것들의 크기와 수, 또한 이것들이 있는 장소, 이것들이 지속하는 시간 등등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색채라는 요소가 감각적인 것에 비해 꿈이나 상상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좀더 단순하고 좀더 보편적인 요소들은 감각적이 아니라 관념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감각적인 영역에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어떤 핵에 도달하여 최종적인 확신에 이른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지속적인 환원의 방법을 통해서였다.
하나하나 의심하여 모든 것이 참이 아닌 것을 알아냈다 해도 거기에 칠해진 색깔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이 현존하는 사물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나 물체적 본성이니, 연장(延長)이니. 양이니 수니 하는 관념적인 영역에서 확신을 얻으려면 다른 차원으로 이행해야 하고 감각적인 방식과는 단절을 해야만 한다.
이때 얻어지는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핵은 관념적이다.

역시 제 1성찰의 다음 부분을 보자.

우리는 아마도 물리학, 천문학, 의학, 기타 복합물의 고찰에 좌우되는 모든 다른 학문들이 매우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대상물이 자연 속에 있는지 없는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아주 단순하고 아주 일반적인 것만을 취급하는 대수학이나 기하학 또는 그 비슷한 학문들은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도 과히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 될 것이며 사각형은 네 변 이상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처럼 명백한 진리가 불확실하다거나 거짓이라는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 단계의 분석에서는 그 어떤 감각적이거나 상상적인 의미도 그 자체로 보존되지 않고 그 어떤 감각의 확실성도 시험되지 않는다.
감각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미, 모든 관념이 광기나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역에서 추방된다.
이때 광기는 데카르트의 관심을 끄는 감각적 환영의 한 경우에 불과할 뿐 특별히 더 심각한 사례라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광기의 가설은 아무런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고 그 어떤 특별한 배제의 대상도 아니다.
여기서 데리다의 '다른 목소리'의 가설이 제기된다. 그에 의하면 데카르트의 텍스트는 두 사람의 대화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감각이 가끔 우리를 속인다고 말한 후 '가끔 우리를 속인 사람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라고 충고한 후에 줄을 바꿔 '그러나'(라틴어로는 sed forte)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을 데리다는 데카르트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가정한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문단은 데카르트의 단호하고 결정적인 생각의 표현이 아니라 앞부분의 의심에 대해 놀라고 항의하는 어떤 비-철학자 혹은 철학 초심자의 놀람과 반대의견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별로 감각적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감각적인 지각을 의심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당신이 여기, 불 옆에, 종이를 들고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다고 그 가상의 상대방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 독자 또는 이 대화 상대방의 놀람을 얼른 받아서 자기가 마치 그렇게 놀라는 것인양 꾸미면서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이 손들과 이 육체가 내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있는가? 내가 나를 정신이상자들과 비교하지 않는한․․․'
'내가 그들의 예를 따른다면 나 또한 그들보다 덜 미쳤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데리다는 이 '그러나 sed forte'가 교육적, 수사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단전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그런 과감한 가설에 놀란 가상의 비-철학자의 놀람 섞인 반박에 다음과 같이 대꾸하는 것처럼 글을 쓴다.
'아니다. 모든 감각적 인식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미친 사람일 것이고 이처럼 광인의 예를 따른다거나 광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일 것이다.

' 이때 데카르트는 대화 상대자의 반박을 메아리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고 글을 쓰고 있고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으므로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며 당신도 역시 미친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둘 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다'라고.
그렇다면 광기의 예는 감각적 관념의 허약성을 나타내기에 적합치 않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생각해낸 것이 꿈의 예이다.
그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좋다. 내가 여기 불 옆에 앉아 있는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미친일일 것이며 광인의 예를 따른다면 나 또한 미친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광기의 경험보다 더 보편적이고 더 일상적이므로 당신에게 좀더 자연스럽고 별로 낯설지 않게 보일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겠다.
그것은 꿈과 잠이라는 체험이다.
' 그러니까 꿈에 대한 언급은 광기의 가설에 대해 쌍곡선을 그으며 그것을 심화시킨 그러한 가설이다.
광기는 감각적 지각의 극히 일부에만 영향을 미치고 머리가 담즙의 검은 증기로 가득찬 특수한 사람만이 겪는 것이지만 꿈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체험이고 전면적인 감각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잠자는 사람 또는 꿈꾸는 사람이 광인보다 더 미쳤다는 것, 혹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꿈꾸는 사람이 광인보다 더 실제적 지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각에서 유래하는 관념의 절대적 전체성이 의심스러워지고 '객관적 가치'를 잃는 것은 잠의 경우에서이지 광기의 경우에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데리다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광기의 가설은 진실을 드러내는 좋은 예가 아니고 회의의 좋은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 지각의 전체에 걸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인은 항상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착란을 일으키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불행하고 비효과적인 예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자기가 말하는 순간에도 자기가 미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철학자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철학자의 저항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광기는 감각적 오류 중의 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광기는 깨어있는 정상적인 사람을 노리는 것보다 약간 더 심각한, 그러나 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해볼 것 같으면 우리가 꿈에서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덜 심각한 육체적 감각적 오류에 불과하다.
이처럼 광기를 감각적 오류의 한 예로 축소시킨 것을 푸코는 광기의 배제, 감금, 코기토로부터의 분리로 보았다고 데리다는 진단한다.
광기가 감각의 퇴폐라면 그것은 육체와 관련된 육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광가는 코기토의 외부로 추방되었다고 푸코는 주장했다. 광기가 외부의 내부, 혹은 내부의 외부에 감금되었다고 말한 푸코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광기는 코기토의 타자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한, 즉 내가 분명하고 명석한 관념을 갖고 있는 한 나는 미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광기를 단순히 육체적인 일로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육체적 과오로 간주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광기의 근본적 성격을 변질시켰다고 그는 주장한다.
광기를 결국 인식론적 결핍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의지의 조급성과 관련된 정신적 쇠약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죄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푸코의 이러한 가설에 대해 데리다는 또다시 두 개의 접속사 '그러나'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첫 번째 '그러나'는 자신이 유리 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사람들의 예를 든 후 '하지만 그들은 광인들이다.
그들의 예를 따른다면 나도 그들보다 덜 미쳤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문단의 첫 마디이다.

이 문단은 꿈에 대한 자연적 회의를 다루고 있다.

그 문단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자신이 인간이며 잠자는 습관이 있고 정신착란자들이 깨어 있을 때 머리에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을, 혹은 더 해괴한 것들을 나 자신의 꿈속에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침대 속에서 옷을 벗고 잘 때에도 얼마나 여러 번 내가 이 장소에 있고 옷을 입고 있고 불 옆에 앉아 있는 것을 꿈꾸 었던가?
내가 이 종이를 바라보고 있고 내가 흔들어 보는 이 머리는 조금도 졸지 않고 있고 내가 이 손을 뻗는 것은 의식적인 것이며 또 내가 이것을 느끼는 것은 결코 두 눈이 잠들어 있지 않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러한 것은 잠속에서는 지금의 것처럼 그렇게 명석하고 판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잠잘 때에도 그러한 환상에 의해서 자주 속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보면 분명히 잠이 깨어 있을 때와 잠을 잘 때를 구분하여 줄 수 있는 아무런 결정적인 징후도 없고 충분히 확실한 표적도 없 다는 것을 그렇게 명백히 보고 나는 놀란다.
내 놀라움은 매우 커서 내가 지금도 잠을 자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 하는 것이 거의 가능할 정도이다.

데리다는 이것을 자연적 회의 안에서의 쌍곡선적 계기 moment hyperbolique l'int rieure du doute naturel라고 부른다.
자연적 회의란 다음에 이어질 형이상학적 회의와 대치되는 말이며 쌍곡선이란 꿈과 광기를 대비시킨다는 의미이다.
쌍곡선은 하나의 곡선과 나란히 그러나 그것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잡아 당기고 있다는 점에서 '과장' 또는 '격화'와 동의어이다. 여하튼 이 자연적 회의 안에서의 쌍곡선적 계기는 몇 문단 아래의 절대적 쌍곡선의 계기 moment hyperbolique absolu와 짝을 이룬다.
이 절대적 쌍곡선의 계기는 우리를 자연적 회의에서 빠져나와 심술궂은 악마의 가설에 접근하게 해준다.
이 계기의 바로 직전에 데카르트는 대수학, 기하학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이 첫 번째 회의(자연적 회의)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곧이어 그는 '그러나'라고 줄을 바꾸어 '그러나 오래전부터 나는 내 정신안에 전능하신 하나의 신이 존재하고 그에 의해서 내가 창조되었고 나의 있는 그대로가 만들어졌다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쓴다.
이 두 번째 '그러나'가 바로 심술궂은 악마의 허구를 이끌어내는 그 유명한 구절의 시작이다.
다른 사람들이 확고하게 믿는 어떤 것도 사실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보아온 나는 내가 매번 둘 더하기 셋의 덧셈을 할 때마다 또는 사각형의 변들의 수를 셀 때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도 신이 내가 그처럼 실망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지극히 선하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안심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이처럼 모든 진리의 근원은 신이다.
그가 꼼꼼하게 방법론적 회의를 진행시키는 이유도 이 최종적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감각적 오류와 꿈과 광기를 통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고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는 마지막 핵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감각에서 유래하지 않는 인식, 즉 대수학이나 기하학같은 관념적 인식은 결코 오류일 수 없다는 확신을 얻어냈다.
이 수학적 진리들은 그 어떤 감각적 오류의 침입도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비록 감각적 오류의 침입은 받을 수 없을지 몰라도 형이상학적 회의의 대상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심술궂은 악마의 가설이다.
진리의 원천인 신은 선하므로 나로 하여금 진리를 진리로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선한 신이 아니라 만일 아주 심술 궂은 악마가 있다면?

그러므로 나는 진리의 원천인 최선의 신이 아니라 그의 모든 계교를 나를 속이는데 사용하는, 전능하리 만큼 교 활하게 속임수를 쓰는 어떤 심술궂은 악마가 있다고 가정하려 한다.

이 악마의 침입까지 막아낸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모든 회의에서 벗어나 참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성찰의 끝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적 회의에서는 광기가 우리의 감각 중 일부분만 그리고 가끔씩만 교란시키는데 비해 심술궂은 악마의 가설, 즉 형이상학적 회의의 경우에는 전면적인 광기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단 심술궂은 악마의 침입을 받으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완전히 실성하여 광인이 된다.
수동적으로 당한 것이므로 나는 이 광기에 대해 책임이 없고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도 없다. 이때 광기는 단순히 육체나 대상적 사물을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순수 사유, 순전히 관념적인 대상, 분명하고 판명한 관념의 장 그리고 자연적 회의를 벗어나는 수학적 진리의 영역까지 완전히 뒤집어 엎는다.
이번에 광기는 그 어떤 것도 피해가지 못한다. 내 몸에 대한 지각은 물론이고 순전히 오성적인 지각까지 송두리채 확실성을 잃는다.

하늘, 공기, 지구, 색채들, 형체들, 소리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모든 외적 물체들은 그 악마가 나의 믿음을 농락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환상과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손도, 눈도, 살도, 피도, 아무런 감각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믿는 것처럼 생각하려 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감각적 기원의 관념이나 지성적 기원의 관념 그 어떤 것도 이 새로운 회의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조금 전에 정신착란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것이 지금은 사유의 가장 본질적인 내면성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푸코의 주장과는 달리 데카르트는 광기를 근본적 회의의 문전에서 쫓아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념의 한 가운데에 위협적인 존재로서 위치시켰고 더 나아가 그 어떤 특정의 인식도 이론상 광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데리다의 추론이다.
인식은 그 어떤 순간에도 그 자체만으로는 광기를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대상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엄밀히 말해서 코기토가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밖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또는 푸코가 말했듯이 '생각하는 나는 광인이 될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이 광기를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다만 비록 내가 미쳤다 하더라도 또는 내 생각이 가끔 미친 사람과 같다 하더라도 코기토의 활동은 여전히 유효하므로 나는 광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유는 더 이상 광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 thode』의 제 4부에 나오는 '회의론자들의 가장 기괴한 가정들도 그것(사유)을 동요시키지는 못한다'라는 구절이 그것을 반증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확신은 광기를 감금하여 안전하게 된 지대에서 얻어진 확신이 아니고 광기 그 자체 안에서 도달된 확신이다.
내가 비록 미쳤다 하더라도 이 확신은 유효하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자연적인 회의의 단계에서도, 형이상학적 회의의 단계에서도 결코 광기를 감금한 적이 없다고 데리다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내가 미쳤건 아니건 간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광기는 사유의 한 사례일 뿐이다. 비록 내 생각 전체가 착란과 광기에 걸려들고 세계 전체가 존재하지 않고 비 상식이 내 생각의 내용까지를 포함하여 세계 전체를 침입했다 해도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나는 엄연히 존재한다.

데리다에 대한 푸코의 재반박

대대적인 감금 현상이 일어났던 17세기에 이미 철학에서 광기를 이성의 타자로서 완전히 배제했는가 아닌가, 이것이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요점이다.
사법적 감금 이전에 철학적 감금이 실시되었다는 가설로 단숨에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떠오른 푸코에 대하여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그 반박에 대해 푸코는 10년만에 1972년도판 『광기의 역사』서문에서 매우 쓸쓸한 어조로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용어를 사용하여 그것을 다시 반박했다.
푸코의 반박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데리다가 제시한 '다른 목소리'의 가설이 몹시 자의적이고 둘째, 광기와 꿈의 시험을 위해 데카르트가 제시한 예화가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데도 데리다가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푸코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성찰 도정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첫째, 감각에서부터 오는 것을 불신하기로 결심한다(왜냐하면 감각은 나를 속이는 일이 있으므로).
둘째, 그러나 감각적 영역의 한 부분을 살려내 보존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예컨대 내 주위의 사물들과 내 현재의 상황 같은 것). 이 유혹이 다시 두 번의 시험으로 나뉘는데 그것이 광기와 꿈에 대한 시험이다.
광인들과 잠자는 사람들을 빼고는 누가 과연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리고 자기가 지금 있는 곳에 대해 착오를 일으킬 것인가?
첫 번째, 광기에 대한 시험에서 시험은 그 자체로 소멸해 버린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미친 사람일 것이다'라고 아예 처음부터 그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니까.
그러나 두 번째, 꿈에 대한 시험은 성공하여 나는 더 이상 내가 지각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중단할 이유가 없고 의심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부터 벌써 광기와 꿈은 대칭적 관계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가끔 꿈이 광기보다 더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데리다도 이 점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서 이 강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리다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광기가 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이상한, 그러니까 꿈의 완화된 형태이므로 굳이 광기를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꿈이 광기보다 '더 보편적인' 체험이고 또 '광인은 항상 착란을 일으키거나 모든 일에 착란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말이 그것을 반증한다고 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꿈이 광기에 비해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고 그것이 회의의 성찰적 경험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광기만큼이나 이상한 또는 광기보다 더 이상한 상상들을 만들어 내더라도 꿈은 언제나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다'와 마찬가지로 '나는 꿈꾸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꿈이 갖고 있는 두 개의 능력은 감각적 착란을 생산한다는 것과 나에게 늘상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이 만들어 내는 감각적 착란은 광기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광기보다 더하며 꿈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나타나지만 광기는 그렇지 못하다. 그것이 늘상 나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성찰의 운동 안에 들어와 완전하고 효과적인 시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면 광기는 즉각적으로 해 볼 수 있는 체험이 아니다.
데리다는 꿈의 첫 번째 측면만 보고 두 번째 성격은 완전히 제외시켜 버린다.
잠이 일상적이라는 사실이 데카르트에게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그것이 광기보다 더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성찰 속에서 모방하고 흉내내기 위해서이다.
꿈의 체험은 성찰의 주체에 의해 실행되는 운동 안에서 효과적인 시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그러나 여기서 나는 자신이 인간이며 잠자는 습관이 있고 정신착란자들이 깨어있을 때 머리에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을, 혹은 더 해괴한 것들을 나 자신의 꿈 속에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꿈의 시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를 구분해 주는 결정적인 징후도 확실한 표적도 없다는 것을 보고서 매우 놀란다.
'내 놀라움은 매우 커서 내가 지금도 잠을 자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이 거의 가능할 정도이다'.
데리다는 이 문단을 '수사학적', '교육적'이라고 규정했지만 푸코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그저 잠의 가능성 안에서 전개되는 성찰의 다음 동작을 허용해 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단의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놀라움'에 의해 실행된 명령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잠을 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육체 전체가 우리가 보는 것과 같지 않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푸코는 광기와 꿈이 정확하게 대응하는 구정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광인들이다'와 '명백히 보고 나는 놀란다'가 대응되고 '그들의 예를 따른다면 나도 그들보다 덜 미쳤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와 '나의 놀라움은 커서 내가 지금도 잠자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거의 가능할 정도이다'가 대응된다.
각기 앞의 것이 광기의 경우이고 뒤의 것이 꿈의 경우이다. 이렇게 보면 광기와 꿈의 대칭 구조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광기는 불가능한 가능성이고 꿈은 너무나 가능한 가능성이다.
너무나 직접적으로 가능하여 내가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에 광기와 꿈의 비대칭성이 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데리다가 광기와 꿈에 있어서의 착란이라는 말만 중요시하고 두 경우를 보여주는 예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우선 잠의 경우, 나는 앉아있고 눈을 뜨고 종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불 옆에 앉아 손을 뻗치고 있다는 상황이 세번 반복되어 나온다.
첫 번째는 성찰자의 직접적인 확신으로서 주어진다.
두 번째는 우리가 가끔 꾸는 꿈으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애를 써 꿈꾸는 시늉을 하는 성찰자의 직접적 확신으로서 주어진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깨어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자기 성찰의 도정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그러나 광기의 경우, 미친 사람들은 자신을 왕으로 여기거나 황금옷을 입은 것으로 여기고 또는 자기가 유리로 된 몸을 가졌거나 자기 몸이 항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꿈보다 더 해괴하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데카르트가 예로서 선택한 광기의 이미지들은 꿈의 그것과는 달리 지금 말하고 있는 개인이 드러내 주는 현실성과 양립할 수 없다.
결국 광인은 다른 곳에, 다른 시간에, 다른 몸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나와 다른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다. 교묘한 비대칭의 전략이다.
데카르트는 노름에서 속임수를 쓰는 도박꾼과도 같이 양쪽에 똑같이 배려를 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내용상의 엄청난 불균형을 카드 밑에 숨기고 있다.
저기 불 옆에 앉아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착오를 일으킬 수 없다.
만일 성찰자가 조금 아까 꿈에 대해서 했듯이 자기가 광인이 된 것인양 꾸미려면 광인의 경우에도 역시 자기가 불옆에 앉아 종이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서 이것이 광인의 환상이 아닐까하고 성찰하는 사람이어야만 할 것이다.
꿈의 경우에는 누구나 착오를 일으킬 수 없는 '지금 여기'의 상황을 제시했는데 광기의 경우에는 누가 생각해도 분명하게 말이 안되는 '유리 몸'이니 '항아리'니 하는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폭력행사가 노출된다고 푸코는 말한다.
꿈이 가진 커다란 자유를 떠들석하게 선언하면서 그는 꿈을 성찰 주체의 현실성에 비끄러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광기는 꿈보다 덜 해괴할 것이라고 확인하면서 실제로는 광기에게 성찰 주체로부터 가장 먼 형태를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광기를 흉내내거나 그것을 반복하거나 또는 자신과 혼동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들은 광인이다․․․'
이것이 광기와 꿈 사이의 비대칭성이다. 또 하나의 비대칭성은 성찰하는 주체에 대한 자격 규정이다.
광인을 가장했을 때 그는 완전히 자격이 박탈되어 더 이상 성찰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잠자는 사람으로 가장했을 때 그는 아무런 자격 상실이 없다.
푸코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은 성찰자의 결심과 성찰 주제의 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밝혀낸다.
제1성찰에는 세 개의 결심이 나오는데 그것은 '나는 우선 따져보려 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가정해 보자' 등이다.
첫 번째 결심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들에 대해'와 관련이 있고
두 번째 결심은 '감각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것'과 관련이 있으며
세 번째 결심은 '꿈'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결심이 세번 있는데 주제는 네 개가 있다.
'견해의 원칙들' '감각적 인식' '꿈' 그리고 '광기'이다.
다시 말하면 광기의 주제에는 그 어떤 특정의 결심이 대응되어 있지 않다. '불행하고 비효과적인 예'라는 데리다의 말은 이 배제를 인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곧 이것이 자기가 광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한 철학자의 말을 부인하는 비철학자의 말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의 가설은 터무니없이 자의적이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그는 성찰이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찰'이란 말하는 주체가 끊임없이 자리를 이동하고 수정하고 자기 신념을 바꾸고 자기 확신에서 일보 전진하는가 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본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는 주체가 고정된 불변의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는 연역적 담론과는 달리 성찰적 텍스트는 자기가 제시하는 가설들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주체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데리다는 성찰적 에피소드를 읽어야 하는 자리에서 '수사적' 또는 '교육적' 허구를 상상하고 있다. 성찰은 정신의 단련에 관한 내용인데 이 단련을 통해 성찰하는 주체는 조금씩 자기 견해를 수정하고 또 견해의 주체가 곧 확신의 주체라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성찰은 이처럼 주체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탈바꿈의 시간적 과정의 연속으로 읽어야만 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이것은 독자들 자신들도 해 볼 수 있는 사건들로서 제시된다.
이 일련의 연속 안에서 의심하겠다는 결심, 감각을 믿지 않겠다는 결심이 사건으로 등장한다.

이 결심 안에서 짐짓 잠자는 척 해보려는 결정이 생겨나고 광기가 고찰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광기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그리고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가능성으로서의 광기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찰하는 주체가 광인이 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광기를 배제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이처럼 자격부여의 방법으로 광기를 가장하거나 광기에 걸릴 위험을 피하게 해 주는 일이 성공하면 광기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와같이 광기의 시험을 회피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광기가 내게 주는 이미지들은 가끔 내가 밤에 잠자면서 꿈 속에서 만나는 이미지들보다 덜 황당하다는 것이 바로 그 정당화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광기의 배제는 실행되었고 광기는 이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할 수는 있으나 사유하는 주체에게 있어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사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광기의 배제를 데리다도 인정하는 듯이 보인다.
'불행하고 비효과적인 예'라고 한 그의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을 자기가 광인이 될 수도 있다는 철학자의 말을 부인하는 다른 비-철학자의 말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성찰의 철학자는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반면 그 어느 구절에서도 자기가 광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부분이 없다고 푸코는 말한다.
성찰에서 주체가 감각, 이미지, 두뇌의 기능에 대해 완전히 근거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꿈꾸기를 가정해 보고 모든 감각이 그를 속인다는 것을 믿는 척 해 본 다음에였다. 그러나 광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광기는 주체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 아니라 시험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된, 배제된 시험이다.
뇌와 증기와 광란의 메카니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찰하는 주체가 이미 광인이 아니어야만 한다. 여기서 또다른 불균형, 또다른 비대칭성이 나타난다고 그는 말한다.
꿈과 광기를 예시하기 위한 에피소드의 내용이 그것이다. 꿈에 대해서 말할 때는 불 옆에 종이를 손에 들고 앉아 있는 아주 일상적인 모습을 예로 든 반면 광기에 대해서 말할 때는 '유리몸'이니 '항아리'니 등의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겪을 수 없는 예화를 제시한 것이다.
꿈과 광기 사이에 진정한 대칭이 이루어지려면 종이를 바라보며 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것이 잠을 자며 꿈 속에서 불 옆에 앉아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불 옆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다고 상상하는 광인이 아닐까라고 가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기는 '담즙의 검은 김으로 뿌옇게 서려있어․․․'라는 식으로 정상적인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머리 속에서만 일어나는 과정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여기에 묘사된 광인의 묘사는 그 시대 사람들이 광기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 통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광기는 성찰자가 새로이 시험하고 경험하는 가설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앎의 요소들이며 이것들은 사람들이 그 메카니즘을 잘 알고 있고 그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으며 정확히 정의를 내려놓았고 잘 통제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친 철학자의 가능성이 사라진 순간 메카니즘으로서의 광기, 질병으로서의 광기가 나타난다.
이제 광기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나 걸릴 수 있는 일상사가 아니라 완전히 정상인과 단절된 질병 또는 죄악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앎을 회의하고 시험한다고 하면서 광기에 대해서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을 그대로 제시하는 부당함을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은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냈다고 푸코는 말한다.
즉 광인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의 거부를 미리 자기 체계 안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체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체계만 충실히 따르면 그것을 간파할 수 없고 철학적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데리다의 반론을 '순진한 담론'이라고 한마디로 일축한 푸코의 재반론의 중심 개념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91년 11월 23일 '『광기의 역사』30년 후'라는 제목으로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학 역사학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이다.
이 논문들은 아직도 『광기의 역사』가 광기의 근원에 대한 우리 시대의 질문에 가장 생생하고 가장 전복적인 도구로 남아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철학자 캉길렘은 푸코의 스승이며 친구로서 또 『광기의 역사』가 박사논문으로 제출되었을 때 이 논문의 보고자로서 이 책의 명성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엘리자베드 루디네스코는 푸코의 작품의 기념비적 성격을 강조했다.
자크 포스텔은 정신의학사의 관점에서 필립 피넬과 그의 저서들에 관해 이야기했고, 클로드 케텔은 계랑적 관점에서 광인의 수용에 대한 푸코의 주요 주제들을 심도 있게 비판했다.
봉인장의 주제에 대해 푸코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던 아를레트 파르주는 푸코와 고문서와의 관계, 특히 광인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추방하는 것을 보여주는 고문서들과의 관계를 기술했다.
아고스티노 피렐라는 이탈리아의 반-정신의학 운동의 맥락에서 『광기의 역사』의 서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상기시켰다.
르네마조르는 정신분석과 푸코와의 관계를 이성의 위기와 광기의 위기 사이에 위치시켰다. 마지막으로 자크 데리다는 30년전, 20년전 푸코와 대립했던 코기토의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채 프로이트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푸코의 다양한 시각을 추적했다.
발표문 중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클로드 케텔의 「푸코를 비판해야 할까?」이다.
그는 기념비 관광을 위해 심포지엄에 온 것이 아니라는 말로 자신의 비판 의지를 밝힌 후, 인류 역사상 앎의 영역에 광인이 떠오른 것이 17세기부터였다는 푸코의 가설에 정면으로 맞서 고대인들도 이미 정신병을 알고 있었으며 17세기의 대대적인 감금 현상도 푸코가 자기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히 부풀린 것이라고 꼼꼼한 문서 고증을 통해 반박했다.
거장을 공격하는 소장 학자가 언제나 그렇듯 그도 원로 학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토론자로 참석한 피에르 마슈레 등이 그의 논증의 신빙성을 강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권위있는 노학자답게 조르주 캉길렘은 푸코를 기리는 모임에 와서 푸코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이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며 모든 논의의 판단은 후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로 커다란 포용력을 보여 주었다.
뤼시앵 멜레즈도 '푸코와 프로이트는 모두 학문에 있어서 가택침입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서 아직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언술의 약속을 본다'라고 말함으로써 기존 가설의 비판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여주었다.
60년대에 전복적인 철학을 들고 나와 인식론의 지평을 열었던 푸코가 이번에는 그 자신도 기성 학문으로 편입되어 후학의 도전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푸코와의 논쟁으로 유명했던 데리다는 그 명성에 걸맞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집중시켰는데 여기서는『광기의 역사』에 나타난 프로이트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 옛날의 논쟁이 데카르트에 관한 것이라면 30년 후의 논술은 이 책의 끝 부분에 가서야 모숩을 나타내는 프로이트에 대한 것이다.
비록 그가 30년 전의 논쟁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그 내용을 재론하지 않을 뿐,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이나 모형, 도식은 그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 자신도 30년 전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문제, 즉『광기의 역사』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여기서도 다시 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푸코의 책이 가진 개척적인 힘은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개척은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다시 말해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다른 통로를 막고 다른 혈맥들을 동여매고 봉합하고 짓누르고 결국 억압해야만' 길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푸코의 한계를 다시 한번 매섭게 지적하고 있다.
무명의 젊은 철학자에서 그 동안 해체주의의 선풍을 몰아 최고봉의 철학자로 등단한 데리다는 90년대의 이 시점에서 자기가 관심을 갖는 것은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와 그 대상으로서의 광기를 대면시키는 방식으로서의 시대나 시기가 아니라 책 그 자체가 속해있는 시대, 그때 이 후 책이 존재하는 시대, 책의 상황을 만들어 주는 그런 시대라고 했다. 즉 묘사된 시대라기 보다는 묘사하는 시대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의 관심은 책의 안에서 책의 밖으로 나온 듯하다. 그리하여 푸코가 꾸준히 대상화시킨 『광기의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책이 뿌리를 내리고 책이 출범하는 역사적 조건과 시대, 즉 정신분석학 시대의 책으로서의 『광기의 역사』에 흥미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에서 누구의 논증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입장이 아니다. 그 어떤 석학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지나치게 세밀한 현학적 관념의 유희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텍스트 분석의 무서운 집중력과 비판자로부터 자기 이론을 지키기 위해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그 철저한 추론의 힘이 놀라울 뿐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 라캉과 프로이트의 이론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이즈음 광기를 최초로 대중적인 앎의 중심으로 끌어올린『광기의 역사』가 새롭게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이 출간된지도 벌써 30년, 이제는 슬슬 그 전복적인 가설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가설이 등장할 때도 되었다. 그런 징후를 우리는 이 논문집에서 본다. 그리고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이 이 모든 새로운 논의들에 직접, 간접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조선시대의 훈고학을 연상시키는 다소 지루하고 난해한 그 논쟁의 일부를 다시 재현시켜 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