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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想 체 게바라의 일기

2004.07.17 00:16

폭우 조회 수:2121 추천:46



체의 일기

  

시에라마에스트라를 횡단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건대 이 날은 축복받은 날이었음에 틀림없다. 투르키노 산 주변에서 가장 가파르고 험준한 계곡 중의 하나인 아구아레베시를 지나 우리는 산체스 모스케라의 부대를 묵묵히 추적하는 중이었다. 이 냉혹한 살인마는 늘 뒤에 시체를 남겨놓고 그 일대를 완전히 불살버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카밀로가 머물고 있음직한 시에라의 두 세 봉우리들 중 하나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했음이 분명했다. 카밀로는 자신의 전위부대원 열두명 가량을 이끌고 서둘러 출발했지만 이 빈약한 부대조차로 1백 명 또는 그 이상이 될지 모를 정부군들을 차단시키기 위해 새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장소에 배치시켜야 했다. 내 임무는 산체스 모스케라를 후미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그를 포위하는 것을 기본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이 일은 적의 후방부대가 불태워버린 농가들의 비극을 상기할 수밖에 없게 했다. 비록 우리는 멀리 있었지만 적들의 고함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저들의 숫자가 총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힘겹게 산허리를 지나는 동안 적은 좁다란 계곡 깊숙이 전진해 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의 새로운 마스코트가 아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마스코트란 세상에 나온 지 몇 주밖에 안 된 작은 강아지를 일컬었다. 펠릭스가 아무리 뒤에 있는 우리의 야영지-요리사들이 머물러 있던 집-로 돌려보내려고 해도 이 강아지는 막무가내로 우리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가느다란 길의 흔적조차 없는 산허리를 타고 앞으로 나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죽은 나무가 새로 자라난 식물에 뒤덮여 있는 빽빽한 밀림지대를 통과하는 일은 그야말로 형벌이었다. 우리는 내키지 않는 초대에 늦지 않기 위해 덤불들과 초목 사이를 겅중겅중 뛰다시피 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조차도 산의 일상적인 평화를 깰 수 있는 그런 지독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거운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강아지가 급하게 짖어대는 것이었다. 녀석은 우리 뒤에 처져 있다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 힘들어지자 절박함에 우리를 부른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강아지를 안아올리자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감시병에게 적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시키고 한 시냇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강아지가 다시 짖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녀석은 우리 주의를 끄는 것도 부족한지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갈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내 입에서 떨어진 명령이 얼마나 단호하였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펠릭스, 이 개가 더 이상 짖지 못하게 해라. 자네가 알아서 해. 다시 짖지만 않게 하란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펠릭스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진맥진한 채 빙 둘러서 있는 대원들 한복판에서 펠릭스는 안절부절 못하며 강아지를 안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더니 그 어린 짐승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파닥거리던 꼬리가 한순간 심하게 경련하더니 차츰 움직임이 희미해져 갔다. 졸린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몸을 한 번 크게 팔딱거린 뒤 싸우기를 포기한 강아지는 나뭇단 속에 고개를 처박은 채 뒤에 남겨졌다.

누구도 그 사건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산체스 모스케라의 부대는 우리를 앞질러갔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우리는 총성을 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산비탈을 내려와서 후위와 가장 빨리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카밀로의 후위가 작전을 개시했음이 분명했다. 산등성이까지 오르려면 한참은 더 가야 했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면서도 우리는 적과 마주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총성은 요란했지만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는 은근히 적과 전투를 벌이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오르막길 끝에 있는 농가도 비어 있는 농가도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지만 적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정상까지 올라갔던 두 명의 척후병이 돌아와서 이런 보고를 했다.

  "저 위쪽에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거길 파보았더니 군인 한명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군인의 호주머니에서 발견했다는 종이쪽지를 가지고 왔다. 적의 기지에서 싸움이 있었고, 사망자와 희생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다.

날이 어둑해졌다. 우리는 녹초가 되어 역시 사람이 떠나간 어떤 민가 앞에 멈춰섰다. 우리가 그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이 마르베르데 지역이었다. 우리는 신속히 돼지고기와 감자 몇 알을 준비했다. 음식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잠시 후 누군가가 집 안에 남아 있던 기타를 집어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농가에는 얼마 간의 가재도구들이 남아있게 마련이었다.

그때 우리를 감싸던 묘한 분위기가 노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둠과 휴식이 가져다주는 나른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펠릭스가 뜯고 있던 뼈다귀를 던졌다. 그때 그 집에 남아 있던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잽싸게 뼈다귀를 물었다. 펠릭스가 그 개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개도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펠릭스가 개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의 눈빛 속에 어른거리는 죄책감을 읽었다. 갑자기 무거운 정적이 우리를 덮쳤다. 다들 형언키 어려운 감상에 젖이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또 다른 개의 부드러운 눈동자 속에서 우리는 우리 손에 죽은 어린 강아지의 원망 섞인 눈빛을 설핏 보았다.

- 체의 일기 1957년 마에스트라의 오솔길을 지나며



  나는 내게 혁명의 불길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마야와 과테말라를 지나 아메리카라는 길을 걸어왔네. 그곳에서 나는 안내자가 되어줄 길동무를 만났네. 우리는 양키들로부터 이 작은 나라를 지키자는 생각으로 함께 살았네. 이제 내가 싸움에 나서야 할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작은 나라, 우리 아메리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곳에서 착취와 빈곤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이라네. 그것은 장차 네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도록 하고 싶은 아버지의 의지이기도 하지. - 사랑스런 꼬마 마오에게 지어준 산문시

  경비행기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우리들 중 몇 명인가가 사탕수숫대를 자르러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때 헤수스 몬타네와 나는 나무 둥치에 기대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아무리 대항하려 해도 내게 총은 별 소용이 없었다. 산을 건너오는 동안 천식이 다시 발병했고 나는 체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느꼈다. 훌륭한 무기는 그것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델이 사탕수수밭에 우리들을 다시 집결시키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내 곁에서도 누군가가 총알과 약품이 든 상자들을 내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는 거의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에게 그걸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것에 신경 쓸 때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상자 두 개를 한꺼번에 옮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나는 그 앞에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약품인가, 아니면 탄약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결국 나는 탄약상자를 선택했다.

내가 상자를 안고 뛰는 쪽으로 총알들이 날아왔다. 돌연 가슴과 목 부위에 불에 덴 듯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내 곁에서 아르벤토사가 코와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놈들이 나를 죽였어! .......' 그 순간 나는 가장 멋지게 죽는 방법을 꿈꾸었다. 잭 런던의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아마 알래스카의 어디쯤이었으리라. 얼어죽을 때까지 놔두는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안 주인공은 고결하게 죽음을 맞기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댄다....... 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일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졌어. 항복해야 돼.'

그러나 즉각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누구도 항복할 사람은 없다!'

마치 두툼한 나무등걸이라도 되는 듯 말라비틀어진 사탕수숫대 뒤로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우리를 향한 사격은 좀 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상자들이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진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총알이 난무하는 한복판에서 겁에 질린 대원들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그들의 입을 틀어막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우리가 우려했던 무시무시한 예감이 현실로 닥쳤다. '놈들이 밭에 불을 질렀다!'

- 알라그리아델피오에서



   거의 경건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오는 여인들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픈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런데 내가 진찰하고 있던 오두막을 아침나절부터 내내 지키고 있던 한 소녀가 자기 엄마의 차례가 되자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엄마, 이거 알아요? 저 의사 선생님은 내내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있어요." 엄밀히 얘기해서 그 아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 의학지식이 미흡했는지 아니면 그들 모두가 정말 같은 범주의 질병을 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들 모두에게 거의 같은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병에 대한 의사의 얘기를 들으면서 환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젊은 부인들은 너무 피곤해서 아픈 겁니다. 아이를 데리고 (그들은 대개, 셋, 다섯, 일곱, 아니면 그 이상을 낳았다) 우물물을 떠오거나, 더러는 더 멀리 떨어진 개울까지 양동이를 들고 오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대부분 그런 반복되는 고된 노동 때문에 병이 듭니다." 그러나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다. 그들의 남편들과 함께 그들의 일상샐활을 개선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그 여인들의 몫이다. 민중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면 탁상공론을 버리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될 때까지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우리 부대로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기는 바닥에 떨어진 데다 음식다운 음식은 구경도 못해 보았고 피투성이 발은 불어터져 신발을 신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대원들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두 눈 깊은 곳에는 다만 희미한 비탄의 빛만이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이들과 함께 걸으면서 나는 이들에게 온기를 불어넣어 줄 수만 있다면 내 혈관이라도 잘라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목멘 소리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그들에게 했다. 그러자 이 특별한 쿠바인들에게 희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배낭과 무기와 장비들이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몸을 하나둘씩 일으키는 것이었다.

  

  여성은 혁명이라는 과업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가장 힘든 일, 즉 남성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흔히 말하는 부대 안에서의 성간의 갈등을 믿지 않는다. 험하디험한 게릴라 생활에서도 여성은 자신들의 성에 적합한 자질을 보여줄 뿐 아니라 남성들과 동등한 몫을 해낸다. 비록 여성이 육체적으로는 남성보다 허약하다고 하지만 끈기면에서는 남성을 훨씬 압도한다. 따라서 여성은 혁명에서 아주 중대한 임무들을 제대로 완수해낸다. 이를테면 적진에 있는 서로 다른 부대들간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메시지나 자금 등의 전달 여하에 혁명의 성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심한 억압하에서도 여성은 남성보다 덜 충동적이다. 여성에게 유리한 점이 한가지 더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유연하게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적의 주의와 경계심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그들의 요리솜씨는 기지 내의 모든 대원들의 일상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제봉틀 한 대만으로도 그들은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 또 있다면 그건 간호와 치료일 것이다. 따듯한 위안, 아! 우리가 다치거나 병들었을 때 그보다 더 갈망하는 단어가 있을까.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도 부부가 함께 기거하도록 허락하기도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남자가 한평생 한 여자하고만 살아야 한다고 어느 누구도 정해 놓은 바 없다. 이 제한을 스스로에게 부과해 놓은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더러는 몰래, 더러는 보란 듯이 이를 어기곤 한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서 규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규율에 따라 행하는 행동이 오히려 편협한 사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각자의 삶이 사회 전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때 누가 그 첫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레메디오에서 나는 전투중에 잠이 든 한 대원에게 훈계했다. 그는 총알이 저절로 발사되고 있었는데도 자기에게서 무기를 빼앗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자네가 스스로 총을 찾을 때만 갖게 될 것이다!' 그 뒤 산타클라라에서 부상자들을 돌아보고 있을 때 다 죽어가는 한 대원이 내 손을 잡았다. '절 기억하시나요. 대장, 레메디오스에서 절더러 스스로 무기를 찾으라고 하셨죠. 그래 전 무기를 찾았어요.......' 잠시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들이 우리의 게릴라들이었다.

  

볼리비아에서의 체의 일기

11월 19일

오늘도 라파스에서 소식이 오지 않았다.  사냥꾼들이 움직이는 토요일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복병처럼 숨어 있다. 지상에서 더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낮고 고요하게 우리는.......

1996년 11월의 분석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나는 무사히 도착했고 대원들의 절반은 아무 문제가 없다. 리카르도의 주요 협조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필요한 기간만큼은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 계획은 다음과 같다.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볼리비아 동지들의 수는 최소한 20명 이상으로 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몽헤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알아봐야 한다.



12월 2일

뜨거운 신념으로 가득 찬 엘 치노가 도착했다. 그와 나는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2개월 안으로 페루 사람 5명이 우리 혁명군에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먼저 2명이 왔는데 무전기 기술자와 의사였다. 그들이 무기를 달라고 해서 M-1소총을 더 사기로 했다. 엘 치로와 나는 페루 민중의 고통과 칼릭토를 해방시키기 위한 대담한 계획을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  혁명군에서 활동하다 살아 남은 몇몇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활동 하고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가보지 못해 정확하게는 모른다고 하니 말이다. 엘 치노는 라파스로 출발하면서 우리의 사진을 가지고 갔다. 코코는 산체스와 대통령 공보관으로 있는 인티의 매형을 만나는 임무를 띠고 떠났다.



12월 4일

혁명 전선, 이상 없다. 앞으로 올 볼리비아인들과 투쟁에 대한 강습을 실시했다.



12월 10일

처음으로 화덕에다 희망처럼 희게 부풀린 빵을 만들어 보았다. 호르헤와 인티가 일부 긴박한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라파스에서는 연락이 없다.



12월 12일

전 대원들에게 투쟁의 실체에 대해 강의했다. 지휘관의 유일성과 게릴라의 규율에 대해 오랜 시간 설명했다. 볼리비아인들 에게는 자신의 소속당 노선에서 벗어나고 규율을 위반할 때지는 책임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실시했다.

호아킨을 제2지휘관으로 임명한 다음 롤란도와 인티는 병참 장교, 알레한드로는 작전 지휘관, 폼보는 서비스 담당, 인티는 재정 담당, 로로는 무기공급 담당, 모로는 의료 담당으로 임명했다.

롤란도와 브라울리오는 사냥꾼이 함정을 파는 동안 다른 팀들은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정찰을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함정이 완성되었다.

밤에 사냥꾼에게 술을 권했더니 신가니(볼리비아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너무나 즐거워 했다. 코코는 카라바니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라구니야스 사람들이 코코가 산 식료품의 양을 보고 무척 놀라워 하더란 다. 마르코스와 폼보도 돌아왔다. 마르코스는 나무를 자르다가 눈위를 다쳐서 두 바늘이나 꿰맸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일부 동지들이 늦게 도착했지만 다 함께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로로는 라구니야스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했다. 문서에 밝힌 대로 명백하지 않은 결과밖에는 얻지 못한 것이다.



12월 30일

비가 많이 내려 강의 수면이 높아졌다. 보급품 운반을 위해 4명의 대원이 출발했다. 바깥소식은 특별한 것이 없다. 비트에 숨겨야 될 물건들을 6명의 대원들이 2번씩 왕래하며 옮겼다.

진흙이 너무 연해서 화덕을 완성하지 못했다.



12월 31일

7시 30분쯤 몽헤가 왔다. 나는 인티, 투마, 우르바노, 아르투로를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갔다. 우리들의 환영은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몽헤와 함께 디비노, 새로운 대원, 타니아, 그리고 우리와 같이 생활할 리카르도도 왔다. 몽헤와의 회담은 전반적인 문제부터 시작했지만 곧 근본적인 사항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요약했다.



  1. 당 간부직을 사퇴하고 당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한 다음 투쟁에 동원될 당 간부들을 뽑을 것이다.

  2. 투쟁이 볼리비아 내에서 진행되는 한 내가 정치, 군사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

  3. 남미의 다른 당들과 연계를 지휘하고 해방운동을 지지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는 도우글라스 브라보의 예를 들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첫 번째 제안은 당 대표로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처리할 문제지만, 당신의 태도에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태도는 유동적이고 타협적이다. 실패한 입장에서 처형당해야 할 사람들이 역사적인 인물로 알려지는 것과 같다. 역사는 내가 옳았다고 기록할 것이다.

세 번째 제안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데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미 실패한 것과 같다고 생각하다. 코도빌라에게 도우글라스 브라보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그 당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용서해달라는 것과 같다.

역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심판할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군사 지휘관인 내 영역을 침범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의 감정은 대립되기 시작했고 회담은 유치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몽헤가 볼리비아 동지들과 토론해본 후 생각해 보겠다고 해서 합의했다.

우리는 새 진지를 방문해 볼리비아 동지들에게 당을 지지할 것인지 게릴라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물었다. 모두 여기에 남겠다고 대답했고 몽헤는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정 무렵 몽헤는 술잔을 든 채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무리요의 새로운 외침을 밝히면서 그의 말을 지적했다.

"우리의 목숨은 혁명 앞에서 결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피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12월의 분석

쿠바 동지들이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 도덕적으로 잘 무장된 그들의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좋다. 물론 몇 가지 작은 문제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볼리비아 동지들은 소수 인원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있다. 몽헤의 태도는 우리 미래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반면에 나를 정치적 약속에서 해방시키고 개인적인 발전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1967년 1월 1일

몽헤의  행동에 문제가 많다. 나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1월 8일에 당 대표직을 사임할 생각이며 곧 떠나겠단다. 그는 자신의 사명은 이미 끝났다고 했다. 마치 총살당할 사람처럼 비장한 인상이었다.

몽헤는 전략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코코를 통해 알고 사표낼 생각을 한 것 같다.

오후에 전체 회의를 하면서 몽헤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혁명을 원하는 모든 사라들과 단결할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앞으로 볼리비아인들에게 고난의 시간이 닥치겠지만 믿음과 신뢰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타니아가 아르헨티나에 가서 마우리시오와 호사미를 만나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문제를 검토했다. 산체스와 함께 그의 임무를 협의한 후 파라스에서 로돌포와 로욜라, 움베르토를 합류시키기로 했다. 카미리에는 로욜라의 여동생이 있고, 산타크루스에는 카빌몬테가 있다. 미토는 수크레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지트로 적당한 장소를 구해야 한다.

로욜라는 경리를 담당할 것이다. 그에게 8만 페소를 보냈는데 카빌몬테가 화물차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2만 페소도 포함된 금액이다. 코코는 산타크루스에 가서 카를로스의 동생을 만나 아바나에서 오는 3명의 접수를 부탁할 것이다.

나는 피델에게 문서 C20#2호에 밝힌 메시지를 썼다.



1월 11일

카를로스, 아르투로와 함께 강계곡을 정찰하러 갔던 안토니오가 밤이 깊어서 돌아왔다. 그가 가져온 장비라고는 우리가 사냥하는 근처 계곡의 물이 냐카우아수강으로 흐른다는 것뿐이었다. 알레한드로와 폼보는 아르투로의 비트안에서 지도를 작성했다 그들은 내 책이 물에 젖어서 일부가 못 쓰게 된 것과 무전기 2대의 고장 사실을 전했다.

마르코스는 밤에 돌아왔다. 냐카우아수강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에서 나왔기 때문에 냐카우아수강과 프리아스강의 합류 지점을 확인하지 못했단다. 정말이지 지도를 믿을 수가 없다. 우리는 아니세토와 페드로의 지도로 케추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보로(물면서 구더기를 내뱉는 파리의 한 종류)의 날이다. 마르코스, 카를로스, 폼보, 안토니오, 모로, 호아킨의 몸에서 파리 구더기를 뽑아냈다.



1월 23일

인티, 롤란도, 아르투로는 다친 동료가 메디코와 함께 은신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러 갔다. 나는 마르코스, 우르바노와 함께 아르가냐라스의 집을 잘 감시할 수 있는 장소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카를로스의 열이 내리지 않는다. 말라리아가 틀림없다.



1월 31일

진지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곤돌라가 깨끗하게 진지를 처리하고 보초는 더 이상 설 필요가 없다. 이곳에는 안토니오, 냐토, 캄바, 아르투로가 남는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4명중 2명은 항상 무장을 해제하지 말고 활동할 것.

2.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접촉을 가질 것.

3. 한순간도 정비를 소홀히 하지 말 것.

4. 새로 들어온 대원들에게는 일반적인 규정과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알려주지 말 것.

5. 진지에는 개인 물건을 비치하지 말 것.

6. 무기는 천막으로 덮어서 산 속에 감춰 둘 것.

7. 진지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적립금을 맡길 것.

8.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을 계속 정찰하며 주변의 강 계곡까지 정찰을 강화할 것.

9. 급하게 후퇴해야 할 경우가 발생하면 아르투로와 안토니와는 아르투로의 비트를 들러서 가고, 냐토와 캄바는 강계곡의 길을 이용해 후퇴하면서 매일 우리가 정하는 장소에 경고 표시를 해놓을 것.

10. 대원이 4명 이상인 경우에는 반드시 몇 명의 예비 비트를 지킬 것.

행진에 대한 마지막 지시를 다른 대원들과 코코에게도 알렸다.



1967년 1월의 분석

몽헤는 내 짐작대로 처음에는 핑계를 대더니 나중에 배반했다. 이미 당에서는 우리를 반대하는 선전을 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로 계속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우리의 길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유리할지도 모른다.

전투적이고 정직한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게바라(체가 아님)는 지금까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켜 보아야 할 일이다.

이제부터 진짜 혁명군 운동의 단계가 하나씩 진행될 것이다. 혁명군 대원들을 시험해 봐야겠다. 시간만이 게릴라와 볼리비아 혁명의 전망에 대해 밝혀 줄 것이다. 그것은 정말 시간문제다. 예견된 것이긴 했지만, 가장 유감스러운 저은 볼리비아 투사들의 입대 문제다. 많은 볼리비아 투사들의 입대를 기대한다.



2월 6일

원기가 좀 회복되는 날이다. 날은 평온하고, 우리는 모두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다시 행진이다.

호아킨은 왈테르, 메디코와 리오그란데강을 따라 8킬로미터를 행진했지만 골짜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염분 성질이 있는 계곡을 발견했을 따름이다.

마르코스는 아니세토, 모로와 함께 물 흐름의 반대 방향으로 조금 걸어갔다. 그들 역시 프리아스강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알레한드로, 인티, 파초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더 나은 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약 1킬로미터 정도 후퇴했다.

폼보가 아프다, 강을 건너려면 내일부터 뗏목을 만들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월 7일

마르코스의 지휘로 뗏목이 완성되긴 했지만 부피가 너무 커서 운반이 곤란하다. 13시 30분부터 강을 건널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해 14시 30분부터 건너기 시작했다. 중간부대가 나머지 대원들을 이동시키려고 하는데 루비오가 실수해서 뗏목과 함께 아래로 떠내려가버렸다. 호아킨은 새로 뗏목을 만들기 시작해 밤늦게 완성할 수 있었다.

비가 더 이상 오지 않고 강물도 계속 줄어들고 있어서 밤에 건너가지 않아도 되었다.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은 투마, 우르바노, 인티, 알레한드로, 나다. 투마와 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밤이다.



2월 10일

나는 인티의 보좌관으로 꾸미고 농부들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인티의 서투른 연기 때문에 우리의 연극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기 농부들은 우리를 도와주기에는 불가능한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오히려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농부의 이름은 로하스라고 했다. 메디코는 기생충으로 고생하는 아이들과 말에 채여 상처를 입은 아이를 치료해 주었다. 오후 시간에 대원들과 함께 옥수수빵을 만들었지만 잘 되지 않는다. 나는 대원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마시쿠리강 쪽으로 10일 동안 행진하다가 군인들을 만나면 곧바로 프리아스강 주변의 다른 길을 정찰하면서 돌아올 계획이다.



2월 11일

오늘은 아버지의 67번째 생신날이다. 그리운 아버지를 가슴에 품고 강가의 길을 따라 계속 행진했다. 오래 전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길은 가끔 없어지기도 하면서 통행하기에 매우 어려웠다. 정오 무렵 갑자기 우리의 시야 속으로 큰 강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 강이 마시쿠리강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거기에서 휴식하기로 했다.

마르코스와 미겔은 강 상류 쪽을 정찰하고 인티, 카를로스, 페드로는 하류 쪽 정찰을 나갔다. 정찰 결과 마시쿠리강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래 골짜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와 말을 보았다. 아마 그 농부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를 엄중히 강화할 필요가 있다.



2월 13일

새벽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아침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고 강물은 많이 불었다. 1레구아 떨어진 골짜기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강 왼쪽으로 길이 하나 있지만 크지는 않다. 강 이쪽에는 페레스의 남동생인 중산층 농부가 살고 있다. 그의 딸은 어떤 군인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 우리는 강과 옥수수밭 사이에 진지를 짓고, 마르코스와 미겔은 기본 길과 연결되는 길을 만들었다. H-650m(태풍이다)



2월 15일

일디타의 11번째 생일이다. 내 딸 일디타가 이 세상에 나온 날, 꿈속에서 일디타는 꽃을 안고 내게로 왔다. 10시쯤에 어제 우리가 만든 길을 다 걸어왔다. 길이 끝나가면서 전진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7시에 논밭이 있는 곳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1시간 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티, 로로, 아니세토가 농부를 만나기 위해 파견됐다. 그 농부는 거부인 니콜라스의 동생 미겔 페레스였다. 하지만 그는 형에게 착취를 당해 돈이 없단다. 친절하게도 그는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2월 18일

사랑하는 나의 아내 호세피나의 33번째 생일날이다.

부분적이지만 우리의 일은 실패가 많았다. 우리는 칼을 이용해 잡목들을 베어내며 길을 열어주는 대원들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14시쯤 되자 칼은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됐고 15시에는 물이 이는 곳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산을 건너가기 위해 진지를 구축했다. 마르코스와 투마는 정찰을 나갔다. 정찰 결과에 따르면 굉장히 거친 바위 언덕이 있단다. 방법이 없다. 뒤로 가는 수밖에는.

아내에게 보내는 긴 입맞춤.



2월 24일

귀여운 막내아들 에르네스티코의 2번째 맞는 생일날이다.

힘든 날이었다. 우리가 따라 걷는 계곡에는 물이 없어서 많이 걸을 수가 없었다. 칼로 나뭇가지를 자르는 대원들이 너무 지쳐서 교대해주었다. 14시쯤 조금이나마 비가 내려서 물통에 받았다. 얼마 후 옹달샘을 발견해 5시쯤 그 주변에 진지를 구축했다. 마르코스와 우르바노는 정찰을 나갔다. 마르코스에 의하면 부근에 2킬로미터 정도 너비의 강이 있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이 온통 늪지도 되어 있단다.



2월 26일

아침에 마르코스와 파초를 불렀다. 마르코스가 파초에게 모욕을 주고 칼로 위협까지 한 것은 사실 같지만 적어도 구타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마 파초 역시 흥분해서 마르코스를 비난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모두 모였을 때 나는 우리가 왜 로시타강까지 가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지를 설명했다. 동시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시련을 위해서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 부끄러운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나는 여러 대원들 앞에서 마르코스의 태도를 비판하고, 파초에게도 역시 그런 일이 또다시 발생하면 혁명 운동에서 제외시키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볼리비아 출신 대원들에게 자신이 투쟁할 의지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시행 착오를 겪지 말고 바로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언제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게릴라부대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했다. 우리는 리오그란데 방향으로 행진했다. 1킬로미터 정도 걸어 가다가 경사가 심한 바위를 만나 다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벤하민이 조금씩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힘내라고 계속 격려해주었지만 그는 끝내 낙오되고 말았다. 조금 후에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벤하민을 목격했다.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거센 강물의 흐름에 밀려 자꾸자꾸 하류로 떠내려갔다. 우리는 그를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벤하민은 결국 익사했다.

그의 투쟁의 의지는 불꽃처럼 강했으나 육체적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2월의 분석

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없지만 대부분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대외적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면 내게로 파견되었다는 2명의 대원들은 소식이 없다. 또 다른 프랑스인은 라파스에 이미 도착했거나 아니면 곧 도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르헨티나 사람과 엘 치노도 소식이 없다. 그러나 정보는 양쪽 모두 활발하게 주고받고 있다. 당의 태도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새로 올 대표단과 토론할 문제가 남았다. 토론 이후에 당의 태도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행진은 잘된 편이었다.

그러나 벤하민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었다. 대원들은 아직 우리가 겪는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 같다. 볼리비아 출신의 대원들 역시 더 단련될 필요가 있다.

대원들이 배가 고파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 더구나 내부적으로 분열돼 있어서 사기 저하 문제는 더 심각한다. 쿠바 출신 대원들도 알레한드로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도의 단련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경험이 부족한 파초와 루비오는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마르코스는 경험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고, 리카르도 역시 명령을 완벽하게 이행하지 못한다.



3월 13일

우리가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결국 우리는 냐카우아수강에 도착했다.

마치 큰 나무등걸이 짓누르는 것처럼 피곤하다.

냐카우아수강의 물살은 아주 세다. 도저히 강을 건널 기분이 아니다. 그러나 롤란도는 자진해서 건너가겠다고 해 15시 20분에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가 마을까지 가려면 이틀 정도는 족히 걸릴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끼인 구운 옥수수와 고기를 먹었다. 이제는 우리가 무엇을 사냥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먹을 것이 결정될 것이다. 오늘 사냥은 메디코와 인티가 맡았다. 베네수엘라 공산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방하고 미국인들 앞에서 소련의 입장을 비판하는 피델의 연설 한 부분을 들었다.



3월 21일

종일 엘 치노, 프랑스인, 벨라오, 타니아와 함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을 하며 보냈다. 프랑스인은 몽헤와 켈리, 시몬 레예즈 등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프랑스로 돌아가 우리를 후원하는 조직을 만든 뒤에 쿠바에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쿠바로 가서 여동지와 결혼해 아이를 나을 생각이라는데 그 생각에는 나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볼리비아 해방운동을 지지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모금을 위해 사르트르와 러셀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 그들이 협력 방안을 모색할 만한 친구들을 만나주어야 하며, 그들은 돈과 약품, 전자기계와 기사 1명이 필요할 것이다.

펠라오는 내 명령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펠라오에게 호사미, 헬만, 스탐포니 그룹간에 연락원으로 행동할 임무를 주고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5명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리아 로사 올리베르를 비롯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가 쓸 경비로 1천 페소를 주고, 전달해야 할 5백페소를 따로 준비했다.

펠라오는 그들의 동의에 따라 아르헨티나 북쪽에서의 정찰 활동을 시작할 것이며, 정찰 후에는 합당한 보고서를 보내야 한다. 타니아가 접촉했던 사람들이 왔다. 그들에 따르면 호사미는 남아 있지 않았으며 타니아가 여기에있어서 접촉을 못 했다고 한다. 또 이반에 대해서는 멸시에 가까운 표현을 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2월 9일자로 발송된 로욜라의 경리 보고서를 받았고 이반에게도 보고서를 2개 받았다. 하나는 군사학교에 대한 사진을 첨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요성이 없는 일부 지역들에 대한 보고였다. 그는 기본적인 문제가 되는 문서 암호를 해석하지 못했다. 또 자신의 태도를 정당하시키려는 안토니오의 보고서도 받았다. 라디오에서 경찰 한 명이 죽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 후 같은 뉴스에서는 죽지 않았다고 하는데, 로로의 말을 들어보니 죽은 것이 사실 같다.



3월 분석

사건이 많았던 달이다. 전반적으로 분석을 해보지만 3월은 게릴라를 재정비하고 체질을 강화한 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쿠바에서 온 괜찮아 보이는 몇 명의 대원들과 게릴라로서 적합호 보이지 않는 나약한 게바라 대원들(배반자 2명, 말 많은 포로 1명, 낙오자 3명, 나약한 사람 2명)을 접수한 것이 오히려 게릴라 활동을 방해한 요인이 됐다.

정확하고 홍보거리가 될 만한 타격을 적들에게 주면서 시작한 활동단계다. 그러나 우리의 활동에 대해 앞뒤를 잘 이해하지 못한 대원들이 많다. 특히 마르코스의 후회라든가 브라울리오의 행동이 그것을 말해준다. 적군들이 반공세를 시작한 단계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를 고립시키려 한다.

2. 대외적으로 선전을 시작했다.

3. 지금까지는 완전히 효과적인 반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4. 농부들을 동원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이동 사정을 고발할 밀고자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정세는 좋지 않지만 이 시기를 넘기면 게릴라 활동은 괜찮아질 것 같다. 그러나 게릴라들을 위한 새로운 시련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모든 대원들이 그것을 각오해주면 좋겠다.



4월 11일

특별한 연장이 없어서 땅을 깊이 파지 못하고 죽은 루비오를 묻어야 했다. 아니, 우리의 가슴에 그를 묻었다. 우리는 물건 이동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인티와 후방부대는 포로들을 석방하고 밀림 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무기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명령 시행에 들어갔다. 그들은 의외로 그곳에서 총을 소지하고 있는 군인 2명을 또 포로로 잡았다. 코뮈니케 1호 2장을 소령에게 주면서 가지들에게 넘겨주라고 했고 그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전투 결과는 10명의 사망 (중위 2명 포함), 포로가 30명(소령 1명, 하사관 여러 명 나머지는 사병)이다. 그들은 제4사사단 소속이지만 다른 연대의 군인들도 포함돼 있다. 그들 중에는 특공대원, 낙하산 대원들과 이 지역 출신의 어린 사병들도 있었다.

오후에는 불필요한 물건들을 비트에 숨기는 일을 했다. 아직도 위장 작전은 완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더구나 행진 도중에 소를 놓쳐버려서 이제는 송아지 1마리만 남아 있는 상태다.

새로운 진지에 도착했을 때 부대원들과 호아킨, 알레한드로가 내려왔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에우스타키오가 보았다는 군인들은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라디오 뉴스는 새로운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졌다고 전했다. 군인은 9명이 사망하고 우리 측 사망자는 확인된 것만 해도 4명이라는 보도였다.

칠레의 한 기자는 우리 진지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콧수염 억이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내 사진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그 사진을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다. 아마 비트에서 발견된 모양인데, 비트에서는 내 사진이 발견돼다는 소식을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고 있다.



4월의 분석

이달에는 4번의 작전이 있었다. 내가 두 번째 전선을 조직할 때 지휘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던 루비오와 롤란도의 죽음은 큰 상처였지만 작전은 실패라고 할 수 없다. 작전 중의 하나는 아주 훌륭했다.

바로 루비오가 죽은 매복 작전이다.

우리는 그때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고 몇 명의 동지들이 병에 걸려 병력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작전의 효과는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아직까지 호아킨과 접촉을 갖지 못하고 있다. 농민들의 지지도도 그다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계획된 테러가 진행되면 농민들의 호응이 높아질 것이다. 현재는 그들 중에서 아무도 게릴라를 자원하지 않고 있다. 죽은 대원들을 제외하면 타페리야스 작전 이후로 로로가 행방불명인 상태다.

군사 전략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부군이 이동을 많이 하지 않고 세력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지난번에 정찰견, 안내원과 부딪친 매복 이후 정부군은 삼림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2. 양쪽에서 뉴스를 많이 보도하고 있다. 아바나에서 내 기사가 나간 후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의혹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다. 벌써 헬리콥터와 녹색모자 대원들을 파견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이곳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3. 정부군(최소 1대대 아니면 2대대)는 전투 기술이 향상되어 타페리야스에서 우리를 놀라게 했으나 메손에서는 사기를 저하시키지 못했다.

4. 정부군에 농부들이 동원되지 않았다. 우리를 방해하는 신고 등을 제외하면 농민들의 활동은 빠르지 못했고 정부군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5. 엘 치노는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그는 두 번째나 세 번째 전선을 조직할 때까지 게릴라 대원일 것이다. 단톤과 카를로스는 체포되고 말았다. 쿠바와의 연락(단톤)과 아르헨티나 작전 계획(카를로스)을 잃어버린 것이다.

게릴라 대원으로서 예비 시험을 통과한 전 대원들의 사기는 저 산맥들처럼 아주 높다.



5월 7일

곰진지에 도착해 우유통조림 8개로 근사한 아침식사를 했다. 가까운 비트에서 일부 물건들을 꺼냈다. 냐토는 계속 토하면서 행진해 건강이 좋지 못하다. 진지에 도착한 뒤 베닉노, 우르바노, 레온, 아니세토, 파블로는 농장 정찰을 나갔다. 마지막 수프와 고기를 나눠 먹었다. 비트에 숨겨두었던 식용유는 조금 남아 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사람 발자국과 진지의 일부가 파괴된 사실로 봐서 군인들이 왔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이 새벽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군인들이 농장에 와 있고 옥수수를 모두 잘라버렸단다.

공식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한 지 오늘로서 만 6개월이 된다. 나의 사랑, 나의 조국.



5월 18일

동생 로베르토와 후안 마르틴의 생일날이다.

제재소 직원이나 군인들이 나타날 것에 대비해 매복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진지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에서 물을 발견했다. 라울의 종양에서 고름을 짜낸 후 감염되지 않도록 치료했다. 그는 거의 걸을 수도 없는 상태다. 캄바의 어금니를 뽑아주었는데, 게릴라 활동을 하면서 남의 이를 뽑기는 처음이다.

작은 화덕을 이용해 만든 빵을 먹었다. 밤에는 출산한 산모처럼 콩국을 맛있게 먹었다.



5월 20일

사랑하는 아들 카밀로의 생일날이다. 오늘은 행진을 하지 않았다. 오전에는 중간대원들이, 오후에는 선발대원들이 매복했다. 양쪽 다 폼보가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미겔이 선택한 위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미겔이 배낭 없이 2시간 동안 정찰한 결과 계곡 아래에 있는 냐카우아수강을 찾았다. 강변에서 2개 소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진지가 발견됐다. 핑곗거리를 잘 대는 루이스가 문제를 일으켜 매복에 참가하지 못하는 벌을 주었다.

기자 회견에서 바리엔토스는 데브레이의 기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국회에서 사형을 다시 승인해 줄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그는 데브레이에 대한 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대답을 회피했다.



5월의 분석

우리가 계속 산에 머물러 있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아직도 호아킨과 접촉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북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싶다.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5월을 분석하면 3번의 전투에서 정부군 측에는 사상자를 냈지만 우리는 사상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피리렌다와 카라과타렌다 작전들이 성공적으로 실행되었다. 기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마닐라, 라파스, 호아킨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아서 우리 대원이 25명으로 줄었음.

2. 농부들의 게릴라 입대가 전혀 없었음. 그러나 농부들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게릴라 활동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음.

3. 콜레를 통해서 당은 의심없이 우리와 협력하기로 했음.

4. 데브레이의 재판은 승리한 10번의 전투보다도 더 게릴라의 중요성을 높였음.

5. 날이 갈수록 대원들의 도덕심과 사기가 강화되고 있고, 그것은 성공의 보증수표.

6. 정부군은 조직력이 약화되고 있고 전술상의 진보가 없음.

체포된 로로가 도망했다.

지금 그는 우리에게 오고 있거나 아니면 파라스에 가서 접촉을 시도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군은 마시쿠리에서 우리를 도와준 농부들을 모두 체포했다고 한다.

머지 않아 농부들에 대한 테러가 시작될 것이다.



6월 13일

칼로 나무를 자르며 전진하는 대원들은 로시타강에 도착하지 못했다. 우리도 1시간 정도 걸었을 뿐이다. 날씨가 아주 춥다. 내일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음식은 5일분치가 남아 있다.

이 나라의 정치 환경이 아주 재미있다. 허울만 남은 수많은 조약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역사상 게릴라 승리가 이렇게 명백하게 보이는 것도 드문 일이다.



6월 14일

나무를 자르러 간 미겔과 우르바노가 가져올 정보를 불을 피우고 기다렸다. 3시까지 돌아오기로 한 그들은 좀 늦게 리오그란데강까지 연결된 길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콩국을 먹었다. 남은 것이라곤 이제 땅콩뿐이다.

오늘은 나의 39번째 생일날이다. 이제 게릴라 대원으로서 미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는 완전한 게릴라, 목숨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혁명군.

아직 많은 부분 남아 있지만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겠다.

그가 말했듯이 그는 게릴라로 태어나서 게릴라로 죽은 것이다.



6월 20일

논밭 주인인 파울리노가 붙들린 사람들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1명은 정부군 중위이고 다른 2명도 장사꾼은 아니라고 했다. 파울리노는 이 정보를 자기 애인인 카릭스토의 딸한테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티가 그들이 있는 곳에 가서 오전 9시까지 중위를 내보내지 않으면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1명이 울면서 뛰쳐나왔는데, 자신은 경찰의 하급 간부라고 했다. 그는 자기와 동행한 사람들의 정체는 헌병과 포스트레르 발예의 교사라고 했다. 그들을 파견한 사람은 포스트레르 발예에서 60명의 군인들을 지휘하고 있는 대령이란다. 그들에게는 오스쿠라강 주변을 나흘동안 정찰하는 임무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들을 총살할까 생각했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전투 전례에 대해 엄격하게 경고하고 돌려보내기로 했다. 어떻게 그들이 우리 진지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본 결과, 아니세토가 보초를 서던 중 홀리오를 만나러 간 동안 그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아니세토와 루이스가 보초를 서면서 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그들에게 7일 동안 보조요리사로서 일하게 하고, 하룻동안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했다. 분만 아니라 오늘 맛있게 먹었던 콩국도 못 먹도록 했다.

포로들에게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았다.



6월 21일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늘 나로 인해 두 손 모아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라 맘 아프다. 언제나 꽃처럼 환하게 만날 수 있을까.

이틀 동안 치아가 아픈 대원들을 치료했다. 오후에 출발해 1시간 정도 걸었는데, 이 전투에서 나는 처음으로 노새를 탔다.

3명의 포로들은 모스케라 길에서 1시간 동안 같이 걷게 한 후 그들이 가진 시계와 가죽 샌들 등 모든 물건을 빼앗고 돌려보냈다. 카릭스토 촌장을 파울리노와 같이 안내원으로 데리고 갈까 하다가 그가 아프다고 해서 그냥 두었다. 물론 우리는 그를 남겨두면서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 하지만 그가 우리의 경고를 잘 받아 들일지는 의문이다.

파울리노는 우리가 작성한 설명서를 코차밤바로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티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마닐라에 보내야 할 암호 정보와 4개의 설명서)를 써주었다. 그 중 4번째 문서는 우리 게릴라의 구성을 설명하고 인티가 죽었다는 거짓 정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다.



6월 25일

암울하고 슬픈 날이다.

길에서 매복중인 5명의 대원을 교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말을 타고 급히 나가보니 강가의 모래 위에 4명의 군인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정부군이 어느 쪽에 있는지 몰라서 무기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때가 17시였다.

우리는 무기를 수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미겔이 자신의 왼쪽 방향에서 나뭇가지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나는 안토니오와 파초를 그곳으로 보내면서 잘 보이지 않으면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거의 동시에 양쪽에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서 후퇴 명령을 내렸다. 후퇴는 신속하지 못했고 대원 2명이 부상당했다는 연락이 왔다. 폼보는 다리에, 투마는 배에 부상을 입었다. 그들을 빨리 수술하기 위해 집으로 후송했다. 폼보는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지만, 앞으로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투마는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여 수술 도중에 끝내 숨지고 말았다. 투마는 마지막 몇 년 동안 뗄래야 뗄 수 없는 동지였다. 그 모든 시련 속에서도 그는 항상 나에게 진실했다. 마치 내 자식을 잃은 듯한 심정이다.

그는 쓰러지면서 시계를 내게 전해주라고 부탁했단다. 함께 있던 대원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 얘기에는 신경쓰지 않자 스스로 시계를 풀어서 아르투로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 전에도 희생된 동지들의 시계를 내가 전달한 것처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시계를 잘 보관했다가 아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투마의 시체를 말에 싣고 가서 좀 떨어진 곳에 묻었다.



6월의 분석

부정적이다. 호아킨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고 갈수록 대원들이 줄어들고 있다.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이달에는 2번의 전투가 있었다. 군대의 발표는 우리 게릴라가 군인 4명을 죽이고 3명을 부상시켰다고 한다. 중요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통신의 부족함으로 지금 대원은 24명. 폼보가 부상을 당해서 게릴라의 기동력이 많이 떨어졌다.

2. 농부들이 게릴라에 많이 입대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우리가 활동을 해야 농부들을 입대시키기 쉬울 것이다.

3. 게릴라 투쟁의 전설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4. 당과도 연락 두절. 파울리노를 통해 연락을 시도하면서 긍정적인 결과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5. 뉴스에서는 데브라이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 그는 게릴라 지휘관인 나하고 연결이 돼 있다는 보도다. 정부가 이렇게 보도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손해를 가져올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6. 게릴라의 정의감과 투쟁심은 강화되고 있다.

쿠바인들은 전투시에 대체로 모범적이지만 볼리비아인 중에서 2~3명이 좀 약한 편이다.

7. 군대가 농부들에게 집을 주고 우리를 신고하게 하는 수법을 쓴다. 주의해야 할 일이다.

8. 탄광 대학살은 우리의 상황을 명백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우리의 설명서가 발표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활동 상황을 알리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라파스와 연결을 재개해 전투 장비와 의료품을 보급받는 것이다. 실제로 투쟁하는 대원들은 10~5명선일 뿐이어서 50~100명 정도가 더 필요하다.



7월 21일

조용한 하루였다.

비록 자기 소는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소 1마리를 팔았던 코카노인과 소 값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소를 판 이후 소값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설사 소를 우리에게 팔지 않았다고 해도 그에게 돈을 지불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돈을 주라고 했다. 밤에는 테헤리아에 가서 큰 돼지 1마리와 찬카카를 샀다. 그곳 사람들은 돼지와 찬카카를 사러 갔던 인티와 베닉노, 아니세토를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7월 24일

3시간 정도 행진하면서 1천 미터 이상 높은 언덕을 넘었다. 그리고 거의 1천 미터 정도나 되는 계곡의 강변에 진지를 지었다. 내일은 좀더 행진이 편리한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곳이 내 생각에는 카날로네스 지역이 아닐까 싶다.

마닐라로부터 받은 정보를 해독중이다. 라울은 막시모 고메즈 군사대학 군관 졸업식 연설에서 베트남 사람에 대해 체코인들이 중상모략하고 있다는 데 대해 반론을 폈다.

친구들은 내가 새로운 바쿠민이라면서 앞으로 3~4개의 베트남이 생기게 될 경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 것인가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7월 30일

천식이 너무 괴로워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 4시 30분에 모로가 커피를 끓이고 있는데 강쪽에서 손전등 불빛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알려주었다. 보초를 서고 난 후 그때까지 잠들지 않고 있던 미겔은 모로와 같이 손전등 불빛의 사람들을 잡으라는 명령을 받고 떠났다.

커피를 끓이던 장소에서 나는 "여보세요", "누구냐?","트리니다드 부대다!"라는 대화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사격이 사작됐다.

몇분 후에 미겔은 M-1소총 1자루와 부상당한 군인의 탄알티를 가지고 군인들은 아바포로 가는 중이며, 모로코에 150명의 군인들이 더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돌발적인 사태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군인 몇 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말 잔등에 짐을 싣는 데 시간이 걸렸고, 네그로가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박격포와 도끼를 가진채로 길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이미 6시가 다 됐는데, 말잔등에 실은 짐의 일부가 떨어져 내려 그것을 다시 싣는다고 또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된 군인들이 사기충천해서 우리에게 다시 사격을 시작했으나 우리는 용케도 그 자리를 피해 떠날 수 있었다. 파울리노 밭에 있는 그의 여동생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우리를 맞으면서, 그러나 모로코의 모든 남자들이 체포돼 라파스로 호송되었다는 큰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대원들에게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자고 말했다. 사격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우리는 강변 길이 끝나는 곳에 도착했다. 그나마 방어가 가능한 장소였다. 미겔과 코코, 훌리오에게는 말을 몰고 계속 앞으로 행진하라고 했다.

후퇴를 책임지는 선발대원 7명과 후방대원 4명 그리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리카르도가 남았다. 베닉노, 다리오, 파블로, 캄바는 강의 오른쪽으로,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휴식할 만한 위치를 간신히 잡았는데 캄바가 리카르도와 아니세토가 강을 건너다가 상처를 입었다고 알려왔다. 우르바노와 냐토, 레온에게 말 2마리를 주어 보낸 다음 미겔과 홀리오를 오라고 했다. 코코에게는 보초를 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결국 다시 미겔과 홀리오가 군인들과 부딪쳐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태로 내 지시를 기다린다고 캄바가 알려왔다. 캄바를 에우스타키오와 함께 다시 그들에게 보내고, 인티와 폼보, 엘 치노와 내가 남았다.

13시에 미겔을 오라고 한 후 홀리오를 보초로 세워두고 나머지 사람들과 말을 끌고 후퇴했다. 코코가 보초를 서고 있는 고지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라울이 죽고 리카르도와 파초가 부상을 당했으며 나머지 대원들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정보를 받았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다. 리카르도와 아니세토가 강을 건널 때 그들은 경솔했다. 그래서 리카르도가 군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었으며, 아르투로는 파초, 아니세토와 함께 리카르도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파초는 부상을 당했고, 그러는 사이 라울이 입에 총을 맞아 죽었다. 그들은 부상당한 리카르도와 파초를 데리고 어렵사리 후퇴를 했는데, 윌리와 차파코도 함께 후퇴했다. 후에 우르바노는 대원들과 말을 몰고 갔고, 베닉노도 자기 대원들과 같이 가다가 그들을 만났다. 밀림 속에서 어렵게 후퇴를 하던 대원들이 겨우 강가로 나와 우리를 만난 것이다. 파초는 다행히 총알이 엉덩이 부분을 통과해 남근을 살짝 빗나가 상처가 크게 깊지 않았지만 리카르도는 상처가 아주 심해 말을 타지 못하고 해먹으로 옮겨져 왔다. 부상당한 파초와 리카르도를 치료하는 동안 나는 미겔과 빠블리토, 다리오, 코코, 아니세토에게 계곡 오른쪽에 매복할 것을 명령했다. 윌리의 배낭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헌혈된 피가 한 봉지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22시에 리카르도는 죽었다. 우리는 군인들이 리카르도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강변의 위장이 잘될 수 있는 장소에 묻어야 했다.



7월의 분석

지난달의 결함이 그대로 이 달에도 계속됐다. 호아킨과 외국으로의 연결이 불가능한데, 사람들은 어느덧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22명의 대원 중에 나를 포함해 몸이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이 3명, 우리의 기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사마이파타 작전을 포함해 군대와 접전을 한 것이 3번이다. 군대 자체가 내보낸 정보에는 군인 7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2. 계곡의 농부들이 게릴라에 입대하지 않고 있지만, 그 전에 알게된 농부들은 다시 만났을 때 우리를 환영했다.

3. 게릴라의 전설은 대륙에 떨쳐질 것이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온가니아가 국경을 폐쇄하고 페루가 경각심을 높이게 된 것이 그 증거다.

4. 파울리노를 통해 접촉하려던 것이 실패했다.

5. 게릴라의 도덕심과 투쟁력은 전투를 통해 강해진다. 그러나 아직도 캄바와 차파코는 약하다.

6. 군대는 능숙한 전투 능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부대들의 전투력이 조금 향상됐다.

7. 정부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됐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바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차관을 주었고, 이것이 볼리비아 입장에서는 도움이 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외국과의 연결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대원들을 입대시키고 식품을 구하는 것이다.



8월 10일

아니세토와 차파코가 사냥을 나가 칠면조와 우리나를 1마리씩 잡아서 돌아왔다. 그들은 첫 번째 진지를 정찰해본 결과 문제가 없었다면서 오렌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을 먹고 나서 나는 또 곧바로 천식이 도졌다. 13시 30분쯤 정찰 나갔던 8명 중에서 캄바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캄바는 어제부터 오늘 아침 9시가 되도록 물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베닉노는 이미 장소를 알아보았다는 연락과 함께 로시타강 방향으로 나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파블로와 다리 오는 물을 찾기만 하면 내일 돌아오겠다고 한다.

피델이 전통보수당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길게 했다. 그는 특히 베네수엘라당을 심하게 비판했다. 다시 치료를 받고 발이 조금 차도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 그다지 양호한 상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래도 내일은 출발을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나무를 자른 대원들이 35분 가량 전진했다고 하니, 내일 출발하면 그들과 곧 만나게 될 것이다.



8월 28일

날씨가 흐리다. 그리고 슬픈 날이다. 목이 말라서 카라코레 빵으로 갈증을 달래야 했다. 갈증으로 고통받는 목을 잠깐씩 속이는 노릇이란 정말이지 할 짓이 못 된다. 그래서 미겔은 파틀리토를 사냥꾼 1명과 함께 물을 찾으러 보냈다. 권총을 주어서 보냈는데, 돌아와야 할 시간인 16시 30분이 되어도 그가 돌아오지 않아 또 코코와 아니세토가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들 모두 저녁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라디오를 듣지 못했지만 새로운 뉴스가 있는 것 같다. 할 수 없이 암컷 말 1마리를 잡았다. 나 역시 그 말을 잡지 않기 위해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한다. 갈증 때문에 배고픈 것은 오히려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됐다. 내일도 역시 물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라디오에서는 타타렌다 지역에서 군인 1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보도를 했다. 군인들은 대개 자기들의 사상자를 알려줄 때는 매우 세심한 편이다.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카라과타렌다와 타페리야스에서 군인들에게 사상을 입힐 사람이란 누구겠는가? 호아킨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행동하는지 아니면 그 지역에서 단독으로 행동하는 몇 사람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8월 30일

정세가 괴롭게 변하고 있다.

물이 없어 나무 자르는 대원들이 정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미겔과 다리오, 엘 치노는 자기의 소변을 마시고는 설사를 하고 사지 마비를 일으켰다. 천신만고 끝에 우르바노와 베닉노, 훌리오가 계곡으로 내려가 물을 찾았지만 노새들은 내려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나와 냐토는 내려가지 않았고 인티가 물을 가져왔다. 얼마나 목말랐던가. 우리는 물을 마시고 말고기를 먹었다.



8월의 분석

전진 기간 동안 가장 나쁜 달이었다. 모든 문서들과 약품이 비축돼 있는 본부 비트를 잃었다는 것은 큰 타격이었으며, 심리적으로도 대원들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월말에 대원 2명을 잃은 것, 그 후 말고기를 먹으면서 행진한 것도 대원들의 도덕심을 약화시킨 것이다. 캄바가 낙오됐다는 것은 게릴라 운동에 큰 보탬이 되지만 워낙 어려운 이런 상황에서는 딱히 좋은 일만도 아니다.

외국과 호아킨과의 연락도 두절됐고, 호아킨 대원들 중 포로가 된 대원들이 정보를 발설했다는 것도 큰 타격이다. 또 내가 천식으로 아프면서 대원들을 불안하게 한 것까지도, 이 모든 악조건들 때문에 이번 달 전투에서는 단지 1명의 군인만 부상을 당하게 한 성과밖에 올리지 못했다. 물 없이 산을 넘으면서 어려운 행진을 했던 것이 일부대원들의 부정적인 행동을 초래했다.

1. 계속 아무 연락이 없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2. 농부들의 혁명군 입대가 전혀 없다. 만일 우리가 농부들과 접촉이 없었다면 몰라도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3. 전체적으로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4. 군대는 별로 효율적인 전투도 못하고 공격이 예리하지도 않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낮은 능력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접촉을 시도하고 새로운 대원들을 입대시켜야 한다. 또한 의료품과 장비도 구해야 한다. 인티와 코코가 날이 갈수록 혁명적이 되고 간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9월 10일

행운이 따라주지 않는 날이다. 잘 행진하다가 길이 나빠지자 동물들은 걷지 않고 속을 썩였다. 급기야 수컷 노새가 걸어가지 않고 뒤떨어지기 시작해 남겨두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코코가 그런 결심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총 4자루 중모로의 총과, 베닉노의 무기 3개와 탄알까지 남겨두었으니 말이다. 나는 노새를 끌고 헤엄치다가 신발을 잃어버렸다. 지금 맨발로 걷고 있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다. 냐토는 또 옷과 무기들을 천막천으로 싸서 가지고 가다가 물살이 빠른 곳에서 놓쳐버렸다. 노새 1마리는 진흙탕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나왔다. 그러나 역시 그 노새가 건널 수가 없어서 꺼내주었다가 레온이 노새와 함께 건너려고 시도하다 둘 다 물에 빠질 뻔했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 계곡에 도착했는데 메디코가 다리가 아파 밤새 끙끙 앓았다. 여기서 건너편으로 가려면 동물들이 헤엄을 칠 수 있도록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주변에 정찰기와 헬리콥터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좋지 않은 징조다. 왜냐하면 저 정찰기들로 봐서 매복할 군인들이 파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내일은 강 위쪽과 계곡 위쪽으로 정찰대원들을 파견해서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확인해야겠다.

내가 거의 6개월만에 처음으로 목욕했다는 것도 오늘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다. 6개월만의 첫 목욕이란 기록은 내가 세운 것이지만 그 기록을 깰 만한 대원들도 몇 명 있다.



9월 17일

파블리토의 생일이다.

구강 검사가 있었다. 나와 아르투르는 차파코의 어금니를 뽑았다. 미겔은 강을, 베닉노는 길을 정찰했다. 그들은 노새들이 길을 올라갈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헤엄을 쳐서 강을 2번이나 건너야 한다고 했다.

파블리토가 22살이 되었다. 게릴라 대원 중 가장 막내인 그의 22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음식을 조금 준비했다.

라디오 방송은 재판 연기 소식과 로욜라 구스만의 체포에 항의하는 내용의 뉴스를 보도했다.



9월 28일

괴로운 날이다. 마치 우리의 마지막 날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새벽에 물을 가지고 온 인티와 윌리는 물을 가져다 놓고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달리 있는지 정찰을 나갔다. 그들은 앞쪽 언덕에 길이 하나 있는데, 그 길로 농부가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10시엔 무장한 군인 46명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나가는 시간이 마치 몇백 년같이 느껴졌다.

12시가 되자 또 다른 군대가 나타났다. 이번엔 77명이었다. 갑자기 총성이 들리며 군인들이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장교는 우리가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꼼짝없이 당하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무전 연락을 받은 군인들이 무슨 연락인지는 모르지만 만족해하는 것처럼 그냥 행진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서는 위에서 공격을 받으면 방어가 불가능하고 또 그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해도 도망갈 길이 없다.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있는데 아주 피곤해 보이는 개를 끌고 군인 1명이 지나갔고 조금 후에는 농부를 앞장세운 군인이 또 지나갔다. 그리고는 그 농부가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이 보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었다. 군인들은 모두 배낭을 지고 있어서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밤에는 군인들이 있다는 집에 불빛이 보이지 않았고 거의 매일 울려대던 총성도 들리지 않았다. 총소리만 나면 아주 괴롭다. 이슬비가 내려서 우리는 젖었다. 라디오에서는 코코의 신원을 확인하고 훌리오에 대한 혼란스러운 보도를 했다. 미겔과 아니세토를 혼동해서 마닐라에서 가졌던 안토니오의 직위를 밝히는가 하면 처음에는 내가 죽었다고 했다가 다시 번복했다.



9월 30일

아침에 칠레의 발마세다 라디오 방송은 군대 고위급 인물들이 밀림 속에서 체 게바라를 포위했다고 보도했다. 국내 방송은 조용했다. 군대는 우리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모양이다.

얼마 지나자 군인들이 양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시쯤에는 40명의 군인들이 여러 분대로 나뉘어져서 긴장한 상태로 걸어갔다. 군인들이 민가에 도착해 경계를 강화했다는 것을 아니세토와 파초가 알려왔다. 인티와 윌리는 우리가 만일 직진하면 이곳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리오그란데가 있고, 계곡 위에는 집이 3채가 있으며, 아직까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적당한 장소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서 돌아왔다.

가까스로 물을 구해 22시에 고생 많은 밤 행군을 시작했다. 엘치노가 잘 걷지 못해 행진은 느렸다. 베닉노는 많이 나았지만 메디코가 여전히 아프다.



9월의 분석

이번달에는 그동안의 피해를 복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렇게 될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겔과 코코, 훌리오가 매복에 걸려 희생됐다. 거기다 레온까지 잃어버리고 우리는 위험에 처해 있다. 캄바의 경우는 다르다. 그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이익이다. 이 달에는 군인들과의 전투에서 1명을 죽이고 1명은 부상을 입혔다. 말을 1마리 죽였고, 우르바노는 정부군 보초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게라의 불길한 매복에 걸렸다. 이제 노새마저 없다. 물론 내가 또다시 천식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노새나 그 외의 동물들은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손실이다.

그룹의 희생자들에 대한 방송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니 희생자들의 그룹은 해산됐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군대를 피해가며 활동할 사람이 몇 명 남아있다. 7명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지난 달과는 달리 군인들의 전투 능력이 강화됐다. 농부들이 우리를 전혀 도와주지 않고 신고하는 사람까지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을 떠나 우리에게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행히 남은 대원들은 사상 무장이 잘되어 있다. 윌리만 제외한다면.



10월 6일

정찰대원들에 따르면 우리가 있는 곳 가까이 집이 1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 지붕처럼 생긴 돌이 있는 곳에서 요리를 했다. 나는 종일 가만히 있지 못했다. 마치 웅덩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식이 좀 늦어지는 바람에 새벽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가까운 곳의 실개천으로 가서 그곳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찰을 할 생각이다.

라 크루스 델 수르 라디오 방송은 원주민 대원 2명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캄바는 레온보다 겁을 먹지 않았다. 칠레 라디오 방송은 우리를 찾는 데 1,800명의 군인들이 동원됐다는 보도를 하였다.



체의 마지막 일기

10월 7일

오늘로 우리 게릴라가 창설된 지 만 11개월이 되는 날이다. 평온한 기분으로 12시 30분까지 쉬었다. 염소를 몰고 오는 아낙이 우리 진지의 개천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낙은 정부군에 대한 별로 믿을 만한 정보는 주지 않고 모든 질문에 모른다고 일관했다. 단지 길에 대한 것만 알려주었다. 아낙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이게라스와 1레구아, 하구에이와 1레구아, 푸카라와는 2레구아 떨어진 곳에 있다.

17시 30분에 인티와 아니세토, 파블리토는 장애인과 난쟁이딸을 둔 여인의 집에 가서 우리에 대해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하면서 50페소를 주었다. 그녀는 단단히 약속했지만 지킬 가망은 거의 없다. 17시에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출발한 행진은 무척 힘들었고 흔적도 많이 남겼다. 우리가 있던 개천 가까이에는 집이 없었는데 실개천 물로 농사를 짓는지 감자밭이 몇 개 보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2시쯤 행진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정부군이 아세로강과 오로강 사이에 있는 우리 은신처를 파악해 37명이 포위돼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세라노에 250명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이해할 수 없는 보도가 있었다.

체포 이후 카스트로에게 올라간 보고



10월 8일

체는 10월 7일 그의 마지막 참호에서 일기를 썼다. 이튿날인 8일 13시에 적군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좁은 계곡에서 저녁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수많은 적군들과 마주치게 됐다.

이 전투에서 체는 부상을 입고서도 나무에 의지한 채 장렬히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다. 10월 8일 2시간 동안 벌어진 격렬한 총격전에서 체의 M-2소총이 망가졌고, 마지막으로 권총을 잡아보았으나 실탄이 없었다. 결국 체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10월 9일

이후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 교실로 포로가 되어 이송되었다. 체는 이송된 지 약 24시간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그리고 체포자들과 술 취한 장교로부터 뺨을 맞는 등 온갖 모욕과 우롱을 당했으나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라파스에서 바리엔토스 대통령, 오반도 국방장관, 그리고 고위 장성들이 모여 체를 학살할 것을 합의한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선 체와 그의 대원들을 어제의 전투에서 모두 사살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어제 투쟁에서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가슴과 머리는 절대 쏘지 말고 다리, 폐 등을 쏴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에 앞서 옆 교실에서 윌리와 엘 치노가 먼저 사살되었다.

그 당시 체는 10월 8일 전투중 숨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라 이게라 학교 교사가 9일날 사살

되었다고 증언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죽은 체의 일기와 자른 두 손을 쿠바로 보냈다.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심문에 체는 "혁명의 불멸성을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다.

아마 그의 마지막 말이었던 것 같다.

게바라는 언젠가 그 혁명의 불멸성을 아래와 같이 말했었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에베레스트는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

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다."

사르트르는 게바라를 '이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