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文學 勳章(훈장/중편) - 이외수

2004.07.26 22:02

폭우 조회 수:4301 추천:47

勳 章(중편)


이 외수

[2] 가을 會話集

준희(焌嬉). 친애하는 말띠, 여류 시인(女流詩人)이 되기 위해 날마다 우울을 연습하며 사는 아가씨. 지금은 밤이고 밖에는 가을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두 알 삼킨 후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어제부터 대학은 문을 닫았고, 이제 휴교령이 해제될 때까지 우리는 매일 공휴일입니다. 따라서 아가씨의 색바랜 빅스톤 청바지를 자주 보기도 힘들어져 버렸습니다. 난해하기가 정신병 환자의 낙서(落書)를 훨씬 능가하는 아가씨의 시를 읽기도, 그 시를 읽고 악담을 퍼부어 주기도 무척 힘들어져 버렸습니다.
시인 아가씨.
가을은 내게 있어 가장 우울한 계절입니다. 가을에 모든 것은 텅 비게 됩니다. 가을에 모든 것은 내 곁에서 죽어 갑니다. 나의 빠레트에는 물감들이 마르고 붓들은 굳어서 방바닥에 뒹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목(盲目)의 방황을 시작합니다. 방황이라는 말은 듣기엔 유치하고 윤기 없는 사어(死語)입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겼을 때의 쓰라림을 나는 압니다.
다시금 돌아온 가을, 이 방황의 스물 여섯 나이를 나는 어떻게 경영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합니다. 춘천(春川). 그 짙은 안개의 도시(都市)로.
그리고 가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언제쯤 돌아올지 아직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울병을 조금은 치료하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몇 권의 책은 휴대할 것입니다. 예상 밖의 공휴일이 내게 닥치기는 했어도 역시공부는 해야 할 입장이므로.
시인 아가씨.
떠나기 전에 아가씨를 한 번 만났으면 합니다. 오는 토요일 오후 세 시 음악이 있는 다실 <우륵>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아가씨께 저녁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고, 만약 나오시지 않으신다면 아가씨께선 푸짐한 저녁 식사 한 끼를 손해 보는 셈이 됩니다. 원래 시인이란 수시로 굶어봐야 제대로의 목청을 가지고 노래를 읊을 수 있다고들 합니다만.
자, 그럼 토요일까지 말띠여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이 가을 귀밑머리를 스쳐 가는 한 가닥 바람, 뜨락에 괴는 식은 금색 햇빛, 눈물겹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밭, 들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아가씨의 빛나는 시를 위해 하나님이 장만해 준 은혜이기를.

낙서중(落書中), 낙서중, 낙서중.
낙서는 왜 하는가. 목이 말라서.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물이라는 물은 모두 오물이니까. 현대인(現代人). 덜컥덜컥. 비틀비틀. 허청허청. 웅성웅성. 죽었군. 자살이야. 대학생은 외로와. 하나님 이로운게 뭡니까. 몰라 인석아. 너 하나님 봤니? 응. 어디서? 만화에서. 만화. 금 하지만 보고 싶은 것. 대학생이 보는 만화, 즉 돈과 빽과 비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못 살아. 원 쓰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에 고독하옵시며 고독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독을 주옵시고, 일용할 우울을 주옵시고, 일용할 불행을주옵시고, 일용할 안간힘을 주옵시고, 안간힘, 안간힘, 안간힘을 주옵시고, 안간힘, 안간힘, 안간힘, 안간, 안, 안, 안, 안간힘을, 휴유---일용할 돈도 주옵소서. 일용할 빽도 주옵소서. 일용할 비굴도 주옵소서. 아멘. 용서해 주옵소서.
낙서, 낙서, 준희는 베토오벤을 좋아해. 준희야 너는 좋으냐 그 우울한 귀머거리가. 담배를 밥에 비벼 먹어 보라. 맛있을까?
옛 동산에 아지랑이할미꽃 피면.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홍도야 우지마라 여기 돈 있다. 가을비. 배호는 죽었다. 돌아가는 삼각지. 철저한 불행. 철저한 고독. 철저한 먼지.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영원한 마돈나야. 마돈나가 무슨 뜻이냐. 앞으로 30년후에 주조회사 사원 채용시험에 나올 것임. 외워 둘 것. 마돈나란 무엇이냐. 마,돈, 나. 마, 시고 돈, 내고 나, 가라구. 이사해야지. 저놈의 쥐떼들 때문에, 쥐쥐쥐 쥐쥐. 쥐를 잊을 수 있을까. 낙서.
잠재의식. 프로이드. 섹스. 처녀는 없다. 처녀 없애기 강조 기간을 설정 하라. 카사노바. 안 돼. 대한 가족계획협회. 나는 바둑이 하고 강에 나가서 놀았습니다. 바둑이는 포인터 순종이었으므로 절대로 개헤엄을 치지 않았습니다. 바둑이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즐거워 하셨습니다. 복날이 내일이지? 죽은 자를 기억 하지 말라.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것은 작고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 춘향이와, 재키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춘향이. 나는 영어를 잘 못해요. 금으로 만든 샌들을 신겨 주어도 원숭이는 원숭이다.
엎질러진 물도 담을 수 있는 데까지 집어 담을 수 있다.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는 난다. 바늘 도둑이 택시 강도 된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뜯어라. 참새가 전깃줄에 두 마리 앉았습니다. 포수가 총으로 한 마리를 쏘았습니다.
명중. 떨어지면서 뭐라고 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쳇, 나만 참샌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살아 남은 참새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역시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쟤 아직 덜 죽었대요, 그랬습니다. 이 정도야 일반 상식이죠. 세상 어려워졌습니다. 대학(大學)에 온 이유. 화가가 되려고. 화가란 무엇이냐. 굶어 죽는 것. 누군가 예술을 위하여 이 황무지에서는 굶어 죽을 필요가 있다.
낙서는 낙서(洛書)가 아니라 악서(樂書). 그러나 악서(樂書)를 악서(惡書)로 읽어도 무방하다. 낙서 끝.

“유혹하지 마세요, 그런 편지로.”
“나도 시인이 되려구 그래.”
“배가 부르시군요.”
“커피 한 잔밖에 안마셨어. 그것도 일금 오십 원어치. 요즘 커피는 임꺽정이 콧물 두 방울 만큼밖엔 안 돼.”
“어젠 뭘 하셨어요.”
“아무 일도 못했어.”
“젊은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하다못해 이빨이라도 자주 닦으세요. 팔에 근육이나 생기게.”
“낭비야. 물과 치솔과 치약의...”
“어제는 천연색 꿈을 꾸었어요.”
“꿈에 뭘 봤어.”
“사르비아.”
“네 시는 쉬어빠진 구정물 맛이야.”
“무식해.”
우리는 수족관 옆에 앉아 있었다. 수족관 속에는 한 마리의 물고기도 살고 있지 않았다. 거기엔 화창하게형광등이 켜져 있었고 열대풀만 무성하게 자라 올라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모래는 희고 깨끗해 보였다.
가늘고 투명한 플라스틱 파이프에서는 끊임 없이 작은 물방울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한쪽 구석에 설치된빨간 지붕의 서양식 물레방아도 뱅글뱅글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모든 것은 정지해 있었다. 거기엔 무서운 고요가 용해되어 있었다. 한마리의 고기도 보이지 않는 수족관 속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으세요?”
“국민학교 사 학년 때 내 짝애를 좋아했어. 볼이 굉장히 고운애였지. 날마다 손바닥으로 한 번만 만져 보았으면 했었지.”
“손발은 늘 씼으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보건소 소장이었어.”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되고 싶어요.”
“어차피 나는 아편을 먹었어. 단연 예술가지. 굶어 죽는거야. 꼭 검사가 돼서 사람들을 감옥에 쳐넣는 일을 거들어 주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굶어 죽는 것도 좋아. 창자가 깨끗한 상태로 죽는다는 건 얼마나 인간적이냐 말야.”
“음악 들리세요?”
“슈벨트. 우리 말로 번역하면 구두끈이지. 슈, 구두. 벨트, 끈 슈벨트, 구두끈. 요절했어. 천재였던가 부지?”
“베토오벤이 좋아요.”
“머리카락속에이가 시글시글 할 것 같아서 싫어. 상처한 지 석달 정도 된 남자가 일금 천오백원짜리 창녀와 하룻밤 동침하고 새벽 골목길을 나설 떄처럼 표정이 참담한 것까지는 좋아 해 줄 수는 있지만.”
수족관 옆에는 수족관의 네 배 정도는 족히 되고도 남을 커다란 유리 상자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 담겨 있는 물은 약간 흐려 있었다. 그 속에는 남미산(南美産) 청거북 두 마리와 악어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놈들은 상당히 흉물스러워 보였다. 가죽에다 아무리 고운색을 칠해 주어도 결코 우아하거나 귀여워 보일 것 같지 않았다. 놈들은 졸고 있었다.
“이놈들은 전부 가짜일 거야. 청거북은 무슨청거북, 저수지에서 건져 낸 자리지. 악어도 그럴 거야. 한 이십 년쯤 묵은 도마뱀.”
“무엇으로 증명해요.”
“우리 아버지는 동물 학자였어.”
“금방 겨울이 올 거예요.”
“왜 이리 시간이 안 갈까. 저 벽시계는 뻐꾹시계보다 더 지독한 병에 걸렸군.”
“한숨 쉬지 마세요. 머리카락 나부껴요. 기껏 잘 빗고 왔는데.”
“머리카락에 지나친 신경을 쓰는군. 백호로 밀어버리는게좋지 않을까. 그러면 해가 한개 준희 머리 속에 축소판으로 들어 박혀 한 이백촉 정도로 빛나게 될 거야.”
“세상 밝아지겠네요.”
다방은 만원이었다.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담배 연기 자욱한 이 다방에앉아 만연된 이산화탄소를 마시며, 다방 조명만큼이나 그늘 끼인 얼굴을 하고 순도 낮은 오십 원어치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오십 원어치의 시간과 오십원어치의 의자와 오십 원어치의 음악을 빌려 잠시 쉬고 있었다. 레지들이 조금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통로를 왕래하며 엽차와 눈총과 하품을 덤으로 탁자 위에 날라다 주고 있었다.
“미치겠어요. 글이 안 돼서.”
“미치기가 얼마나 힘들다고. 나도 못 미치는데.”
“쳇, 자긴 또 뭔데.”
“나는 천재야. 무엇이든 실패해 버리는데 천재지. 요즘 계속 덜컥덜컥이야. 어딘가 고장이 난 거지.”
“박재가 되어 버린 둔재군요. 난 뭐 요샌 써 볼 글이 없어요. 어느새 나도 눈치보며 쓰게 됐나봐.”
“무슨 눈치?”
“악담가의. 그리고 뭐...”
그녀는 우리 회화과(繪畵科)에서 좀 이질적인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별명이 하족(夏足)이었고, 그것은 남자를 오뉴월 양말 갈아신 듯 갈아치우고, 갈아치우고 한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녀는 회화과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림보다 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느 월간 문예지에 두 번 추천받은 경력이 있으며 이제 한 번만 더 추천을 받으면 완전히 <시인(詩人)으로 시인(視認)된다>는 거였다. 그러나 이 마지막 한 번의 바리케이트 앞에서 그녀는 날마다<밋치겠어요>였다. 그녀는 날마다 <밋치겠어요>였지만 <아, 나 못 미쳐>였다.
“준희는 내가 먹었어.”
우리과(科) 녀석들 중에서 정말 식인종 같이 음흉한 귓속말로 내게 경고하는 녀석이 서너명 있었다. 그러나 웬지 나는 그 녀석들의 말이 믿기지 않았따. 나는 오늘 밤 그녀의 방종을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이제 오후 네 시.
“술 한 잔 할테야?”
“끊었어요. 간장이 나빠져서.”
“다시 붙여.”
“엄마에게 물어보고.”
이 때 레지 하나가 하늘색 플라스틱 양동이 한 개를 들고 우리 곁으로 왔다. 그 속에는 열대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레지는 그 양동이를 수족관 속에 처박았다.
갑자기 수족관 속은 혼란하게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 십, 아니 수 백 마리의 열대어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했다. 레지는 양동이 속에 들어 있던 플라스틱 바가지 속에다 열대어 몇 마리를담아 남미산 청거북과 악어가 있는 유리 상자 속에 넣어 주었다. 그 흉물스러운 남미산 물짐승들은 금방 활발한 동작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바가지의 열대어들을 다 잡아먹어버렸다.
“비싼 음식 먹고 사는군 팔자좋은 놈들이야.”
나는 갑자기 흉물스러운 동물들을 꺼내어 껍데기를 홀랑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준희, 내가 저 놈 가죽으로 핸드백 하나 만들어 줄까?”
나는 진심으로 준희에게 말했다.
“그 성의로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아, 그런데 왜 이리 배가 고플까?”
“나는 저 동물들이 지독하게 맘에 안 들어. 건방지게도지금은 나를 노려보기까지 하는군.”
“조심 하세요. 피해망상증 초기 증세예요. 젊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에요.”
“도대체 악어를 길러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겠다는 거야. 어쩌면 저 놈이 잔뜩 커서 나중엔 손님들에게까지 입맛을 다실는지도 몰라.”
“증세가 점점 악화되면 전문의를 찾아가 상의해 보세요. 그런데 왜 이리 배가 고플까.”
“점심 안 먹었군.”
“연탄이 사망해서 빵으로 때웠어요. 내가 무슨 문화인이라고.”
“나도 약간 출출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 제2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꿈 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의 멜로디를 마저 듣지 못하고 우리는 계단을 내려 왔다.
“어디 악어고기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 없을까? 남미산 악어고기.”
“악어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쓰실까. 혹시 그 우람해 보이는 모습에 열등 의식을 느낀 건 아닐까?”
“저 놈이 크면 반드시 꼬리로 유리를 깨뜨리고 나올거야.”
“피해 망상증 초기 증세예요.”
밖은 그래도 다방 구석보다는 공기가 맑았다. 길 위에 깔려 있는 가을 햇빛은 아직도 약간의 온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어깨와 머리 위에 그 온기가 약간 남아 있는 햇빛을 묻혀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돈 있으세요?”
“은행에서 좀 찾아 왔지. 여행도 가야겠고 해서.”
“은행에서 찾았다니까 갑부 아들같이 높아 뵈는군요. 아니꼬와라.”
“아버진 선장이었어. 오나시스가 타는 배의...”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삐 걸었다. 그 무엇에겐가 바쁘게 끌려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이 기계와 돈과 안간힘의 시대에서 적어도 우리만은 여유를 가지자고 말하면서, 우리는 뻥과자 한개씩을 사 으적으적 씹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바쁘게 끌려 다녀야 할 것인가.
내가 캠버스에 문질러 대었던 그 수많은 색깔, 밤을 새워경영하던 그 한 없는 공간, 발버둥, 추구, 시도, 실패와 극복, 이런 것들이 고작쉽게 밥벌이를 하기 위한 인생 연습은 아니었다.
하늘이 맑았다. 천고마비지절(天高馬肥之節). 실감나게도 나는 말띠인 아가씨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거리마다식당은 많았다. 그러나 준희의 마음에 드는 식당은 좀체 나타나질 않았다. 어마간판이 도대체 마음에 안 들어, 중앙식당이 뭐야. 또 북경반점은 뭐고. 낡았어, 저런 간판은. 저 식당 요리사들은 새롭고 신선한 요리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거야. 동화반점, 우리식당, 평양식당, 별미관, 순두부집, 모두 마찬가지야, 뭔가 새로운 이름의 식당은 없을까. 준희는 헤매었다.
“간판을 먹으려는 거야?”
“아뇨, 무언가 새로운 음식을.”
“그 음식은 무엇을 재료로 하여 어느 나라 식으로 만든 음식인지.”
“나도 잘 몰라요. 하여간 새로운 음식이라는 것 뿐.”
“새로운 음식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어.”
“뭔대요?”
“빈대부침. 모기튀김. 거미구이”
나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상당히 오래 걸어 다녔고, 준희는 의외로 새로운 음식을 강력하게 고집 부렸고, 마침내 우리는 지쳤다고 말하며 한식집 하나를 선택했다. 그 한식집 간판은 <식당 신선로>였다. 한자로 쓰면 틀리겠지만 <신선...>은 새로운 것에 가깝지 않은가. 우리는 거기서 음식을 팔아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식당 문 앞으로 걸어 갔다. 이 때였다. 한 사내가 우리 앞을 가로 막은 것은.
“선생님들.”
우리는 동시에 흠칫 멈추어 섰다. 사내는 아주 낡은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겨드랑이에 목발 한 쌍을 끼고 있었다. 그의 한 쪽 발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즈봉 가달만 헐렁하게 쳐저 있었다. 그는 조금의 비굴한 기색도 없이 씽긋 웃으며 우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십 대의 건장한 체구였다.
나는 말 없이 십 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어 그 위에 얹어 주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그 손바닥은 계속 우리 앞에서 떠나지 않고있었다. 나는 또 한 개를 꺼내어 얹어 줬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약간 화가 났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흐흐. 이봐요. 젊은이. 이래뵈도 육군 중사 출신이요. 갈매기 하나에 동전 한 개이면 비싼가요. 싼가요.”
나는 준희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동전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어요.”
준희는 손지갑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동전 한개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내의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동전은 아주 새것이었다. 그래서 사내의 손바닥에 놓이자 대단히 강렬하게 한 번 반짝 빛났다. 사내는 곧 그 빛을 손바닥으로 감아 쥐고,
“복 받으쇼”
하고 말하며 돌아섰다.
식당으로 들어서며 준희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 사람 참 바보예요. 육군대위 출신이라고 말하면 다이아몬드 한 개에 백 원씩은 받을 수가 있는 건데.”
그러나 나는 잠자코 식당 벽에 붙어 있는 메뉴를 읽고 있었다.
“그만 마시세요.”
그러나 나는 계속 마셨다. 주점 안은무척 붐비고 있었다. 시끌시끌했다. 누군가는 계장 욕을 하고, 누군가는 마누라욕을 하고, 누군가는 타락한 예술가를 욕을 하고, 누군가는 저질 연탄을, 누군가는 악덕 운전사를, 욕하고 욕하고 욕하면서 더러는 껄껄 웃고 더러는 분노하고, 더러는 우울해 하면서 술들을 마시고 있었다. 주점 벽에는 낙서가 거미들처럼 거믓거믓 기어다니고 있었다.
“준희는 내가 먹었다.”
나는 오늘밤 그녀의 방종을 확인 해 볼 것이다. 삼 학년이 되면서부터 나와 그녀는 가까와졌다. 학보(學報)에 내가 게재한 수필을 읽은 다음부터 그녀는 내게 친절해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그녀의 입술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알아보려고 들지 않았었다.
“보이를 하나 꼬셔야 할 텐데.”
그녀는 나와 자주만나면서 또 다른 시간을 이용하여 이른바 헌팅에 나서곤 했었다. 청바지 한쪽 종아리를 걷어 붙이고 목에는 새빨간 머플러를 나부끼면서, 니가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니가 나를... 하는 노래를 휘파람 불며 불량 소녀 흉내를 내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가끔 거리에서 그녀가 번번이 다른 남자와 동행하는 것을 보았었다. 그녀의 얘기는 간단했다. <보이>를 만들려고 꼬셔 놓고 보면 사흘도 못 가 <뽀이> 같아서 그만두어 버린다는 거였다. <보이>와 <뽀이>는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그만 마시세요!”
준희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마셨다. 그리고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을 때 비로소 나는 술잔을 놓았다.
비틀거리면서 택시를 잡았다. 준희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밀면서 어디로 갈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로 가겠어요. 혼자”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그때 나는 하나의 장소를 생각해 내었고 그 장소에다 그녀를 밀어 넣듯 그녀의 등을 힘껏 밀어서 택시에 태웠다.
“A대학 정문 앞으로.”
나는 운전수에게 말했다. 택시는 서서히 앞으로 밀려 나가 몇대의 차를 비켜서더니 곤장 A대학이 있는 방으로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미쳤나봐. 이 밤중에 학굘 가게.”
준희는 약간 불안이 풀어진 듯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오분도 못 되어 택시는 우리를 대학 정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내렸다.
정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안으로는 쇠빗장이 견고하게 가로 질러져 있었다. 그러나 수위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철문은 쉽게 타 넘어 들어가 안으로 걸린 고리를 벗길 수가 있었다.
대학은 어둠 속에서, 마치 몰락하고 있는 옛 궁성처럼 음산해 보였다. 거대한 건물 속에서 낮고 무거운 신음 소리라도 들려 올 것 같았다.
어이없게도 나는 대학의 모든 풍경이 죽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무섭게 누워 있는 건물들의 동체에서 조금씩 죽음의 냄새가 퍼져 나와 잔디밭을 메우고 잔디밭에 서 있는 조각품들을 적시고, 숲과 숲의 모든 나무들까지도 쓰러뜨릴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잠시 그 풍경들을 둘러보며 길과 건물과 숲과 게시판 따위들이 불안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작은 빈터 하나를 찾아 내었다. 앉았다.
“수상한 짓 하지 마세요.”
준희가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왜 그런 웃음이 나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검은 나뭇잎들들 사이로 밤하늘이 내다 보였고 간간이 별도 찾아 낼 수 있었다.
나는 용기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약해져있었다. 내가 마신 술은 그녀를 가져 버리라고 충동질 하는 대신 별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를 우울 속으로 몰아갔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왔고,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졌고, 곁에앉은 준희의 머리카락 속에는 비누 냄새가 났고, 정신이 자꾸 말똥말똥해져 갔다.
“내일 떠나세요?”
“떠나지.”
“부럽군요, 부러워. 어디로든 도망쳐 버릴 수 있으니까.”
“한숨 쉬지마 내 눈썹 나부껴.”
나는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면서, 우울하다, 라고 말했다.
“우울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걸려 있는 병이래요.”
“가을에만 우울해, 고약한 병이야.”
나는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그녀는 따뜻했으며 그녀의 입술에서는 국화냄새가 났으며, 나는 우리 과 녀석들의 그 음흉한 말을 앞으로 절대 믿지 않겠다고 작정해 버렸다.
갑자기 통금 사이렌이 목놓아 울었고, 그 소리는 오래도록 하늘에 떠서 길게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 맹수의 울음 같은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유목민처럼 외로와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엽신(葉信)I>
여기 안개는 여전하고 내 옛날의 기억도 여전합니다.
아가씨. 오늘 오늘 도착해서 간단히 짐을 풀었습니다. 호수가 보이는 여인숙입니다. 지금 도시는 안개 속에 흐리게 지워져 있습니다. 몽환의 도시입니다. 안개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체험했던 나의 술, 나의 방황, 나의 어둠, 나의 모든 빌어먹을 것들을 서서히 가리워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는 나 살던 곳이므로 친구도 있고 낯익은 물, 낯익은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역겨운 내 일상 중에서 잠시만의 위안이 될 뿐, 언제나 곁에 있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가씨. 가능하면 나도 여기 머물러 있는 동안을 이용하여 나의 <풀잎>하나를 꼬셔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인(詩人)이여, 당신은 철저하게 고독해야만 시(詩)를 쓸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자학하며 사십시오. 그러나 굶거나 몸에 상처를 입히지는 마십시오. 부디 시 속에서만,시 속에서만 우십시오. 밤에는 깊은 잠을, 낮에는 젊은 시를. 그리고 안녕.
일요일. 임 원일(林 原一)이가


버스는 가래 끓는 소리를 뱉으며 가파른 길을 헐떡헐떡 기어오르고 있었다. 길은 나선형으로 되어 있었고 창 밖으로 내다보면 길 밑에 길, 그 길 밑에 또 길이 보였다.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한 켠으로는 산이 벽처럼 버티고 서있었으며 돌이 굴러 떨어짐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그물이산을 모두 싸고 있었다.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현기증뿐이었다.
버스는 천천히 좀 더 천천히 아주아주 천천히 기어 오르고 있었다. 승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슨 요새로 침입해 들어가는 특공대처럼 모두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래도 위도 까마득했다. 만약 내 몸이 창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면 저 밑 까마득한 첫째 길바닥에 떨어져 박살날 때까지 주기도문을 스무 번정도는 외고도 아멘을 다섯 번 정도 더 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길을 운행할 때 운전수는 위대해 보인다. 특히 이런 길을 침착하게 서행할 줄 아는 운전수는 더욱 위대해 보인다. 나는 지금 운전수가 위대해 보인다. 표정이 안정감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불안하다. 왜. 차가 고물이기 때문에.
그러나 고물은 도중에서 우리를 빈대떡으로 만들지 않고 고맙게도 무사히 목적지까지 다 올라 왔다.
소양댐.
나는 출사원(出寫員) 완장을 두르고 카메라를 멘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 본뒤, 한가한 마음으로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배가 떠나려면 아직 한 시간 반 가량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강 다목적 댐 안내판.
높이 백 이십 삼 미터.
길이 오백 삼십 미터.
전폭 오백 오십 미터.
만수위 백 구십 삼점 오 미터.
나는 저수되어 있는 물을 보기 위해 난간으로 걸어갔다.
보라, 저 물. 호수도 강도 바다도 아닌 저 암록색의 무시무시한 물을 거기에는 세상의 어둠이라는 어둠이 모두 괴어 있었다. 물은 거대한 짐승처럼 구비구비 꿈틀거리며 멀리 꼬리를 산 뒤에 감추고 누워 있었다.
나는 안내판을 다시 살펴 보았다. 거리 관계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재 수심이 백 미터를 넘고 있었다. 그 깊이를 상상해 보았다. 한 없는 미궁처럼 생각되어졌다. 발목에 돌을 매달고 투신한다면 내려가는 동안에 지루해서 혀를 물어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기념탑 앞으로 돌아 왔다. 기념탑은 상당히 높았다. 기념탑 밑에는 사업 개요가 적혀 있었고 총 공사비가 2백 6십 9억 7천 8백만 원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나로서는 그 돈이 어느 정도 놀라운 액수인지 금방 느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스케치북에다 계산하기 시작했다. 백 이십원짜리 소주 이 홉들이를 산다면 몇 병이나 되겠는가. 나눗셈.원래가 셈본 실력이 형편없는 나는 상당히 오래 허우적거리며 계산을 해야 했다. 역시 하도 엄청나서 실감이 안 가는 숫자가 나왔다.
2억 2천 4백 8십 1만 6천 6백 6십 6병을 사고 팔십원이 남았다. 도대체 이게 몇병인가. 숫자가 나왔지만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또 계산해 보았다. 하루에 다섯병씩 그 소주를 마신다면 몇 년이이나 걸리겠는가. 한참만에야 답이 나왔다. 오, 이게 도대체 몇 년이냐. 나는 그만입이 딱 벌어지고, 식은땀이 나고, 살 맛을 잃어 버렸다.
12만 1백 8십 7년 동안 마시고 삼백구십 병이 남는다. 지옥에까지 가져가서 두고두고 마셔야 할 판이었다. 휴우. 나는 스케치북을 덮어 버렸다. 맥빠진다. 맥빠져!
맥빠지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댐의 풍경만 구경하고 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물을 내려다 보았다. 저 무시무시한 물이 모두 소주로 보였다.
사람들은 수시로 밀려드는 관광버스에서 내려 댐을 둘러 본 뒤 사진을 찍어대곤 하였다.
“이봐요. 출사원 아저씨!”
나는 갑자기 큰소리로 사진사를 불렀다. 사진사 한 명이 내게로 뛰어 왔다. 그리고 찍겠느냐고 물었다.
“찍읍시다.”
사진사는 나를 보고 무엇을 배경으로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내 얼굴을 찍으려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걸 찍어 주십시오.”
“농담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사진사는 찍었다.
돌에 새겨진 그 현기증 나는 거액의 사업비는 26,978,000,000을.
사람들은 무엇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는가. 내가 발견한 이 숫자의 엄청남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사에게 선금 반액을 지불한 다음 내 주소를 불러 주었다.
사람들은 애인과, 또는 남편과, 친구와 아니면 단체로 이 역사적인 장소에 다녀감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기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기념하라. 인간은 기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기념하라. 태어난 지 백 일이 되는 날의 고추를 기념하고, 태어난지 일년이 되는 날의 잔치상을 기념하고, 성년이 되어 노력 끝에 올린 결혼식, 그날의 아스파라스를 기념하고,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맞이한 환갑 날의 웃음, 그대의 묘비에 그대의 일생을 글 몇 줄로 기념할지니.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배는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소주를 한 컵 들이켜고 새우깡 두 알을 아작아작 씹었다.
“사랑을...말입니까?”
“네.”
“해보았습니다. 대학을 가기 전 나는 두 해를 묵었습니다. 그 때 내가 살던 퇴폐의 마을 남춘천에는 밤 열한 시 사십 분에마지막 열차가 들어 왔었습니다. 주황색 불을 줄지어 밝히고 열차는 아주 천천히 들어옵니다. 두어 번 기적이 울면 나는 반드시 창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내 집은 철로 연변에 있었으므로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몽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주황색 불빛에 젖어 있었고, 그들은 아주 낯선 땅, 멀고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한 정거장을 거쳐 이리로 오는 사람일지라도 불빛은 그를 아주 멀고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었죠.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때로는 얼굴이 갸름하고 무척 슬프게 생긴 여자가 은은한 불빛에 젖어서 나를 멍하니 내다보는 수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멍한 눈은 틀림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되어집니다. 그런 여자가 서서히 내 앞을 스쳐갈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민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내가 그 여자를 잠깐만 사랑하고 말았었죠.“
사내는 내 말을 다 듣고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배는 탐험선 처럼 이 낯선 풍경 속을 계속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산이라는 산은 모두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사실...나는 누구에게든 내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내 아내는...”
사내는 소주를 한 컵 마신 다음 잔을 내게 건네 주었다. 사내는 아까부터 새우깡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안주를 들라고 권해도 네, 라고 대답만 하고 그냥 깡소주를 들이켰을 뿐이었다.
“내 아내는 정말 굉장히 예쁩니다. 크게 웃을 때 보이는 왼쪽 어금니 끝에서 두번째 충치를 빼고는 모두 예쁘죠. 아마 지금쯤 나와서이 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형씨는 한눈에 놀라 버리고 말 겁니다. 형씨는 한눈에 놀라 버리고 말 겁니다. 하도 이뻐서.”
“슬을 이렇게 많이 마셨다고 화내지 않을까요?”
“내 아내는 압니다. 내가 왜 술을 마시게 되는가를.”
“형씨는 술을 왜 마시게 됩니까?”
“잊으려고.”
“무엇을?”
“부끄러운 것을.”
“무엇이 부끄러운 데요. 물론 술에 취했다는 것이 부끄러웁겠죠.”
“형씨도 읽었군요. 쌩떽쥐베리. 내 아내도 읽었습니다. 어린 왕자를.”
사내 곁에는 수국이 한 다발 놓여 있었다. 그 꽃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사내의 아내가 좋아한다는 꽃이었다. 오늘은 사내의 월급날이었고, 그래서 사내는 친구들과 왕창 한 잔 했으며 삼차 하러 가자고 다른 술집으로가다가 꽃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수국을 보자 하도 아내가 그리워져서 그만 친구들을 잠시 따돌리고 꽃 한다발을 사서 아내에게로 가게 되었다는 거였다.
나는 배를 탔을 때, 사내 곁에 놓여 있는 수국이 하도 탐스러워 보여서 배를 타기 전 미리 준비했던 소주를 권하며 그 탐스러운 꽃의 주인을 향해 말을 건네어 보았던 것이다.
“형씨.”
사내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이제 조금씩 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술의 분자가 세포 하나하나마다 젖어 들어 내살을 노을빛 혼곤으로 몰아 갔다.
“만약 사람이 죽어서 다른 동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형씨께선 무슨 동물로 태어나시겠습니까?”
사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늘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물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사내의 물음에 대답했다.
“지렁이...지렁이로 태어나고 싶은데 어떨까요.”
사내는 지렁이라뇨? 하고 반문했다.
“네, 지렁이로 태어나겠습니다.”
“너무 조잡스럽게 한평생을 보내지 않게 될까요?”
“형씨는 지렁이를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습기찬 땅바닥을 오래도록 기어가고 있는 한 마리의 지렁이를 유심히 관찰해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형씨는 아실 겁니다. 아마.”
“무엇을 말입니까?”
“지렁이가 얼마나 외로운 동물인가를.”
“형씨는 지렁이를 동정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랑합니다. 너무 외로와 보여서.”
“너무 외로와 보여서....”
사내는 되받아 중얼거리다 껄껄껄 웃어 버렸는데 그 웃음은 웬지 허탈이 섞여 있는 듯했다.
배는 이윽고 품걸리까지 왔다. 그리고 엔진을 끈 뒤 소리 없이 선착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선하는 손님은 사내와 나, 둘뿐이엇다.
배는 우리를 남겨 두고 다시 엔진 소리를 뱉아내며 멀어져 갔다.
사내의 아내는 마중을 나와 있지 않았다.
“형씨....”
사내가 머뭇거리며 내게 악수를 건네었다.
“저는 왼쪽 길로 가야 합니다. 형씨는 저쪽 길. 배 여행 즐거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나는 사내의 손을 힘주어 한 번 쥔 다음 돌아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형씨!”
몇 걸음 옮겨 놓았을 때, 사내가 다시 내 겉으로 달려와 나를 불러 세웠다.
웬지 사내는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어....어려운 부탁입니다만.... 이십미터 정도만 나를 바래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허허 웃었다. 사내가 어린애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죠.”
“고맙습니다.”
사내는 물과 접한 비탈을 헤치고 앞서 걸었다. 길도 없었다. 바로 아래는 그 시커먼 물이 침울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여깁니다.”
사내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느리게 느리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내 아내 얘긴데... 내 아내는 작년에 폐를 앓다 죽었습니다. 무덤이 바로 저 아래였는데 댐을 막은 뒤 물에 잠겨 버렸죠.”
사내는 수국꽃이 파리를 뜯어 조금씩 물 위에 뿌리면서 점점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내 아내는 이곳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었지요. 뭐 공무원 봉급, 껌 값밖에 안되는 걸 가지고 어떻게 내 아내를 살릴 수 있었겠소. 하여간 내 아내는 죽었지요. 그래서 치료비도 이제 들지 않게 되었고, 나는 그 돈으로 술을 다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녀도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한 꽃도....죄송합니다. 형씨, 혼자 있고 싶군요.”
사내가 다시 내게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을, 그리고 너무 슬퍼 말기를.....
나는 사내를 거기 홀로 남겨 놓고 아까의 길로 되돌아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막막한 물, 뱃길 한 시간 사십 분으로 여행하면서 내가 뿌려 놓은 아픔들이 은빛 물무늬로 잔잔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걸었다. 길에는 수없이 많은 비단개구리들의 펄쩍펄쩍 뛰어다니거나 교미에 열중해 있거나 창자가 터져 나자빠져 있었다. 물에 잠긴 산, 물에 잠긴 마을, 그러나 아직도 이 길은 잠기지 않은 어느 마을에론가 통하고 있을 거였다.
몇 걸음 물가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나는 낚시질을 하는 소년 하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녀석은 싸리가지 끝에다 실을 맨 원시인의 낚시대로 저녁 찬거리를 낚아 올리고 있었는데, 녀석의 솜씨가 좋은지 아니면 고
기들이 덜 약아서인지, 던지면 척척이었다. 손바닥만한 붕어들이 퍼덕퍼덕 낚여 오르는 것이다.
“어이, 소년 강태공 말 좀 묻겠노라.”
녀석은 인기척을 듣고 돌아다 보았다. 까맣게 그을은 얼굴이 산골아이답게 순박해 보였다.
“여기가 바로 품걸리 일 터이니, 품안 국민학교로 가려면 어떻게 어느쪽으로 가면 좋은가.”
“품안리 말이지유?”
“옳거니.”
“곧장 가다가 오른쪽 길로 꺽어 가서는유, 또 한참 걸으믄 품안리루가는 데여유. 중간에핵교 또 하나 있어유. 그거는 품걸 국민핵교구, 거기 가서 물어 보믄 알아유. 품안 핵굔 품걸 국민핵교 분교니께.”
녀석은 자상하게 일러주고 다시 원시인의 낚시대를 맵시 있게 던졌다.
“고맙노라.”
나는 일러 준 대로 곧장 걸었다.
나무들은 노을 속에 활활타고 있었다. 화냥년 속가슴처럼 활활타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 보였을 때 나는 더욱걸음을 빨리 하였고, 지금 기분으로 말하면, 객지 생활 몇 년만에 알거지가 되었어도, 정든 곳 보이자 마음놓이는, 한 시골의 청년이 된 것과 흡사하였다.
마을마다 파란 저녁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좁은 산길을 타고 아이들과 함께 몇 마리 소들이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를 길게 끌며 마을 어귀로 접어 들었다. 개들이 달려 나와 짖고 있었다. 낟가리 밑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지대한 관심이 서려 있는 눈초리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 소년 강태공이 일러 준 대로 오른쪽 길로 꺽어들어서 한참을 곧장 걸어 갔다.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았고 서녘 산머리가 붉게 노을져 있었다. 거기 노을진 자리를 가로질러 몇 마리 새들이 어디론가 헤엄쳐 가고 있었다.
<품걸 국민학교>
이윽고 학교를 만났다. 나는 마치 초도순시 나온 교육감처럼 교문 앞에 턱 버티고 서서 현판을 읽었다.
품, 걸, 국, 민, 학, 교.
그 다음 보무도 당당하게 운동장을 가로 질러 곧장 교무실을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교무실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숙질실이나 사택이 있을 테지. 나는 찾기 시작했다. 쉬웠다. 찾기가. 교실 세 칸짜리 학교 바로 뒤에 교실 한 칸짜리만한 집이 한 채 있었고, 거기문 위에 숙직실이라고 쓴 문패가 걸려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곧 문이 열렸다. 전형적인 일선 교사 차림의 삼십 대 남자 한 분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
“저어, 품안 분교를 찾아가는 길인데요....”
“아, 그러시군요. 거기 누굴 만나러 가십니까? 실례지만.”
“탁 인국이라고, 제 동창입니다.”
“아아, 탁 선생님. 계십니다. 그런데 시간이 어떻게 될지. 곧 날이 어두워지고 더구나 초행이실 텐데. 길이 가파른 산길이라 놔서.”
“뭐, 젊으니까요.”
“그러믄 말이죠, 저기 뵈는 저 길로 계속 올라 가시면 세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오른쪽 길로 가세요. 저 산을 넘고 나면 신작로가 나오고 신작로 건너편에 또 산이 보일 겁니다. 그 산을 또 넘으셔야죠. 신작로에서 보면 밤에도 길은 잘 보입니다. 그런데 원채 험준해서 원.”
“괜찮습니다. 몇 시간이나 걸릴까요?”
“다섯 시간쯤 걸릴 겁니다. 밤중에, 아니 어쩌면 새벽에 도착하시겠군요.”
그래도 가야죠, 라고말한 뒤 나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휘파람을 불면서 개울을 건넜다.
산길을 타고 오르면서 나는나는 벌레들의 낮은 울음 소리와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와 뱀들이 굴로 돌아가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개울물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자꾸만 오르막이 게속되었고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길은 좁았으며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나는 숨이 차 오르는 것을 의식하면서 잠시 바위에 주저 앉았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댐이 생기고 길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이렇게 산에다 신발 하나 크기의 길을 새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을 하늘 위에 뜬 달은 마음 착한 새댁의 손으로 닦아놓은 놋그릇처럼 말갛게 빛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달을 자세히볼 수는 없었다. 울창한 삼림뿐 하늘은 잘 보이지 않았고 다만 가랑잎 위에 떨어진 잔해만 볼 수 있었을 뿐 이었다.
나는 산을 하나 넘었고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긁혀 쓰려 왔고 옷도 찢어져 있었으며 발바닥은 물집이 생겨 따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산과 싸웠다. 산의 고요와 싸웠다. 산짐승들의 울음과 등 뒤로 서리는 나의 참혹한과 싸윘다.
그리고 이제 두개의 산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길은 좀 평탄해져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소금물 머금은 배추잎 처럼 축 늘어져서 비틀거리며 내려 가고 있었다. 어디선지 밤새가 울었다. 어디선지 바람이 내게로 오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다리가 아프고 온 몸이 무거워 왔다. 그래도 나는 걸었다. 임무처럼 걸었다. 숙명처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산 아래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고 개들만 잠이 깨어 요란하게 짖어댔다.
학교를 찾기는 쉬웠다. 마을의 끝에 양옥집 같은 학교가 잠들어 있었다.
<품걸 국민학교, 품안 분교.>
나는 친구의 환성을 생각하며, 그동안 이 첩첩 산골에서고독만 질경질경 씹었지, 엄살을 떠는 얼굴을 생각하며 숙직실을 찾았다. 불이켜져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러나 문을 연 것은 친구가 아니었다. 나이가 좀 많아 뵈는 남자선생님 한 분이었다. 나는 인사하고, 친구를 만나러 왔음을 설명했다.
“아, 탁 선생님. 오늘 애인이 서독 간다고 배웅 차 춘천으로 나가셨는데요.
아시겠지만 탁 선생 애인은 간호원 아닙니까. 교장 선생님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본교에 알리지도 않고 슬그머니 떠났어요. 아마 모레쯤 들어 올 겁니다.
누추하지만 방으로 들어 오시지요. 길이 험해서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네.”

<엽신(葉信) III>
생각 속의 그 무엇이 나를 그리로 가게 했던가.
기진해서 내가 당도 했을 때, 만나야 할 사람은 거기 없었고 자옥한 물소리만 남아 있었읍니다.
이튿날 아침. 하늘 아래 첫 동네 깊은 산중은 가을이 더욱 차게 당도해 있었고 잎들은 벌써 우수수 지고 있읍니다.
아 그러한 아침한때의 아리인 기억을 얼굴에 적시면서 나는 왔던 길을 혼자 되돌아 가고 있었읍니다.
이윽고 맞이하는 깨우침도 무상한 하늘이며 바람이며 물에 있었고 나는 시종 말이 없었읍니다. 배편으로 기나긴 시간을 띄워 보내며 마침내 나도 물이 되었읍니다. 다시 또 쓰게 되기를.

목요일. 임 원일(林原一)이가.

<엽신(葉信) V>

오늘 신문을 보았습니다. 내일아가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학이 문을 열게 되었으므로.
벼르고 별러서 한번 가 보려던 아버지의 무덤을 오늘까지도 못 가 보았읍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나타나기가 아직은 부끄럽고 두렵읍니다.
이제야 나는 알겠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철저하게 불행했고, 가장 철저하게 고독했던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음을. 나는 아버지의 훈장을 열심히 닦으며 내 어리석었음과 죄 많았음을 곰곰이 생각해볼 계획입니다. 또다시 우울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다시 만나고 우리들 이마에 서린 우울을 서로 한 겹씩 걷어 내어 줍시다.

돌아갈 준비 중에. 임 원일(林原一)이가.

다시 개강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가방 속에 화구들을 쳐넣고 두꺼운 노트와 함께 대학의 문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새벽이 되어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고 잠이 오지 않았으며, 잠이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제 나는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살갗 전체에 꺼끌꺼끌한 털이 돋아 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냈다. 그것은 책상 다리에 부착되어 있었다. 딸깍, 손가락을 밀어 올리자 잠들었던 형광등이 몇 번 깜짝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고 이어 방안이 확 밝아지면서 모든 사물들이 한꺼번에 알몸을 드러내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에 갇힌 한 마리 야행성 동물처럼 방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방안은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시장 부근의 공동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던 내 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남자 친구를 처음 방으로 불러들이는 날의 가정과 일 학년 여학생 방처럼 말끔했다. 밤중에 나는 대청소를 실시했던 것이다. 공영히 없는 논문집을 뒤적거려 보기도하고, 반듯이 누워서 천장의 사방연속무늬를 모조리 세어 보기도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까지 편지를 써 보기도 하다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대청소를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책이며, 옷가지며, 화구(畵具)며, 소줏병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방바닥으로 쏟아져 나와 뒹굴던 나의 실내를, 그 너저분하고 무질서한 나의 일상, 나의 껍질, 나의 비틀비틀, 그것들을 나는 정돈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발가벗겨진 듯한 썰렁함이여. 이제 모든 사물들이 모두 나를 떠나서 저희들끼리만 시침뚝 떼고 단정하게 제자릴 잡고 앉아 있다. 혼자 사는 남자의 삭월세 오천 원짜리 단간방은 좀 지저분하게 어질러 놓을 필요가 있다. 허전하지 않기 위해서. 어질러져있을 때는 그래도 덜 허전한 마음이었다.
나는 묵은 노트 한 권을 책꽂이에서 뽑아냈다. 그리고 집히는 대로 몇 장을 뜯었다. 그 다음 아주 잘게 찢어서 방바닥에 뿌리거나, 구겨서 이리저리 던져 놓거나, 두어겹으로 접어서 팽개쳐 놓았다. 확실히 좀 덜 허전한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창가로 갔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언덕 아래 잠들어 있는 도시는 유리창 속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따금 빗물에 젖은 도시의 불빛들은 투명 기법의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서 흔합되거나 해체되면서 떠다니고 있었다. 도시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문드러지고 있었다. 침몰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는 도시를 내다보다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 왔다. 뭐 별로 읽어볼 책도 없었다.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랍 속에는 소중한 비밀도 값 나가는 물건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두 개의 서랍을 빼어 그 안에 든 물건들을 방바닥에 좌르르 쏟아 놓았다. 그리고 빈 서랍을 도로 꽂아 놓았다.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거울 속에는 말라빠진 젊은 놈 하나가 들어 있었다.
놈의 얼굴은 병색이 짙어 보였으며 놈의 눈섭 언저리에는 우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놈을 향해 웃음을 던지고자 했다. 그러나 놈은 오히려 울상을 짓고 있었다. 웃어라 자식아. 웃어, 웃으라니까. 웃겨 주렴. 웃기네.
자식. 잠이나 자라. 나는 입김을 불어 놈의 얼굴을 지워 버리고 그 위에 유방이 달린 개구리 한 마리를 그려 놓았다. 그 다음 또 할 일이 없어져 버려서 잠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였다.
몇 시나 되었을까. 궁금하여 포켓용 라디오를 틀어 보았다. 아무것도 방송되지 않았다. 다만 라디오 속에는 솨아 하는 강물 소리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언젠가는 아침 방송이 시작될터이므로 나는 그 강물소리를 흘러가는 데까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 몇 시나 되었을까. 짐작컨대 세 시 정도일 것이다.
나는 잠을 청하려고 애를 썼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뻐꾹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 분 전 네 시였다. 어제나 통금 해제 오분 전을 가리키는 시계.
시계는 약 한 달 전부터 절명해 있었다. 도무지 시간이 맞지 않아서 몇 번이나 병원을 드나들었고 그러다 마침내 노망까지 들어서, 태엽을 감아줄 기분조차 들지 않는 고물이었다. 산 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치료비가 몸값보다 더 많이 허비된 고물이었다.
노망이 들기 전까지는 그래도 사랑해 줄 건덕지가 한 가지는 있었다. 이 시계는 뻐꾹 시계였던 것이다.
한 시에는 뻐꾹.
두 시에는 뻐꾹, 뻐꾹.
세 시에는 뻐꾹, 뻐꾹, 뻐꾹.
그렇게 울 줄 알았던 것이다. 비록 기계이긴 하지만 목청만은 아주 청승맞아서, 늦은 봄 햇살 따가운 내 고향 뒷산, 솔밭에서 슬피 울던 진짜 뻐꾸기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놈이 그렇게 울 수 있는 기계만 아니었더라도, 나는 놈을 내 방으로 데려오기위해 거금 팔천 원을 아낌 없이 지불하진 않았을 거였다.
“중고품이긴 하지만 시간은 기차게잘 맞을 겁니다. 좋은 시계 사신 겁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망할 자식. 나는 그 새파란 점원 녀석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었다. 그러나 채 석 달이 못 되어 이 중고품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십 분씩이나 늦게 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정도 더 지나서는 숫제 열중쉬어.
나는 하는 수 없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으로 시계를 싸들고 그 시계점을 찾아 갔다. 그러나 옛날의 그 자리엔 옛날의 그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시계점은 어느 새 꽃집으로 둔갑해 있었고 새파란 점원 녀석대신 늙그스레한 중년 남자가, 시계 대신에 밝은 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수시로 시계 병원을 드나들었다. 시계는 치료를 하고 돌아오면 기특하게도 한 달 정도는 제대로 바늘을 움직여 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였다. 시계가 노망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그날은 일요일. 나는 약속도 특별한 계획도 없었더랬다. 그저 레포트 하나를 쓰는 일로 오전을 보내었더랬다.
그날 나는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았을 때, 시계는 정각 두 시를 가리키려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나는 은연중에 들려온 두 번의 뻐꾸기 울음을 의식하게 되었다.(뻐꾹. 뻐꾹)
내 눈은 시계의 분침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곧 <정확하고 멋있는 오리엔트 손목시계가> 자신 만만하게정각두 시를 시보했다. 그래도 내 뻐꾹시계는 한참동안 울지 않았다.(뻐꾹. 뻐꾹.)
나는 분침에 시선을 매달고 기다리면서 시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잘 맞는 시계는 얼마나 주인을 흐뭇하게 만드느냔 말이다.
정확하고 멋있는 오리엔트 손목시계의 시보가 있고 약 삼 분 정도가 지나서야 내 뻐꾹시계의 분침은 12시로 완전히 겹쳐 들게 되었다.
(뻐꾹. 뻐꾹)
당연히 그렇게 두 번 울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내 시계의 자랑이다. 울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멋은 있는 나의 시계여.
그러나 무슨 해괴한 사건인가.
(뻐꾹. 뻐꾹.)
정말 그렇게 울었을까.
아, 아니었다. 그것은 시계 노망, 시계의 주착, 시계의 종말이었다. 놈은 이렇게 울었다.
띠리리리릭, 뻑...뻐, 뻐, 뻐, 틱!
망할! 그리고 또 한참 있더니 한 스무 번 정도를 계속 울어 젖혔다. 한꺼번에 하루치를 몽땅 울어버리겠다는 듯이--- 뻐꾹뻐꾹뻐꾹.....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뭐 저 따위가 다 있어. 나는 기계에 대해서는 맹물이었으므로 속수무책,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놈에게 태엽을 감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놈은 관상용 시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잠이 안 오고 시간이 풀어진 국수가닥처럼 맥적을 때 놈을 발견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나는 놈을 방바닥에 끌어 내렸다.
한 번 고쳐 볼 심산이었다. 불가능이란 없다. 지당하신 말씀. 나는 이 노망한 기계를 고치는데 필요하다고 것이면 모조리 꺼내 놓았다. 드라이버, 송곳, 족집게, 칼, 손톱깍기(여기엔 쓸 만한 도구들이 몇 개 끼워져 있었지만), 옷
핀, 펜치, 등등. 그다음.... 캔트4절지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 방바닥에 깔았다.
우선 뒷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드라이버로 몇 개의 나사를 뽑아내어 케이스와 기계를 완전히 분리해 놓았다. 뼈와 내장이 드러난 이 늙은 시계는 아주 볼품 없어 보였다. 나는 돌팔이 의사가 희귀병 환자를 눕혀 놓고 짐작으로 병명을 때려 잡은 뒤, 사람이야 죽건 말건 내장을 꺼내 놓고 보자는 식으로 드라이버와 칼과 송곳과 손톱깍기 따위의 수술 기구들을 무자비하게 시계 속에 쑤셔 박기 시작했다.
몇 개의 나사와 톱니바퀴와 철판이 뜯겨져서 하얀 종이 위에 정돈 되었다.
용수철이, 쇠막대가, 강철지환이 뜯겨져서 하얀 종이 위에 정돈되었다. 잘 안 빠지는 것은 송곳을 디밀고 망치로 두드려 빼기도 했다. 분해하기는 쉬웠지만 생각보다 부속들은 정교하고 다양했다. 나는 마치 시계와 전투를 벌이듯이 땀을 뻘뻘 흘리고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는 골격만 남게 되었다. 나는 득의만만해 하면서 시계의 노망이 어디서 발생했는가 뒤적거려 보았다. 그것은 쉽게 발견되었다. 그것은 따로 하나의 톱니바퀴군(群)을 형성하면서 시간에따라 횟수를 변경하여 좌우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놋쇠판의 조임나사가 헐거워져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놋쇠판은 열두 개의 톱니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톱니는 뻐꾸기 울음의 횟수를 조정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 톱니는 태엽과 연결 지워진 톱니바퀴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간에 맞춰 놋쇠판은 탄력 있는 고무공 하나를 누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고무공을 누르면, 그 곁에 붙어 있는 나팔이 청승을 떨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누르면 뻑, 놓으면 꾹.
나는 조임 나사가 풀어져 제멋대로 움직이던 놋쇠판을 바로 잡은뒤 있는 힘을 다하여 조임나사를 바른편으로 틀었다. 그리고 톱니를 하나하나 조정하여 고무공을 눌러 보았다.
뻐꾹, 뻐꾹, 뻐꾹.
정말 신통했다. 띠리리리... 고장났을 때의 이 소리는 헐거워진 놋쇠판이 톱니 위를 그대로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 걱정 없었다.
자, 이제 조립할 차례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 부속품들을 역순(逆順)으로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몇 개 못 맞추고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무리 맞추어도 헐겁거나 맞물리지 않거나 틀어졌기 때문이다. 십 분도 못 되어 내 머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맞추고 뜯고 맞추고 뜯고---- 를 수없이 죄풀이 했다. 나는분해할 때보다 더 발악적으로 시계와 싸웠다. 시계 속에 내 온몸을 밀어 넣을 듯이 하고 기나긴 시간을 등 뒤로 보냈다. 자꾸만 비지땀이 흘렀다. 그야말로 고전분투였다. 신경질, 신경질, 신경질.
이윽고 언덕 아래의 도시로부터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점점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렌 소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지속되어 있는 동안은 모든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의문자판을 뒤집어 보았다. 여전히 오 분 전 네 시였다. 나는 오 분을 당겨 주어 정각 네 시로 맞추어 놓았다. 나는 이제 지쳐 버렸다.
문득 배가 고팠다. 내가 이 시계를 완전하게 조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이란 있다.
나는 시게의 부속과 뼈대를 서랍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속이 빈 시계 케이스를 벽에 반듯하게 걸어 놓았다.
그것은 이미 시계와 상관 없는 무엇이었다. 내장을 모조리 파먹힌 어떤 것의 시체였다.
그 속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 속에는 약속이 없었다. 그 속에는 다만 공허뿐이었다. 나와 함께 두 해를 살아온 그 일금 팔천 원짜리 뻐꾹 시계는 이제 영영 살아나지 않을 거였다. 그 속에는 내 일상의 회의와 절망과 곤혹, 아니면 썩어버린 시간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배가 고프군. 배가 고프군. 나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두꺼운 마분지 상자 앞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 상자에 인쇄되어 있는 <삼양(三養). 쇠고기. 주의. 햇빛과 습기를 피해 주십시오. 50 食入 삼양식품 공업주식회사> 따위의 글자들을 무심코 읽은 다음 그 속에서 문명인의 대용식사 한 봉지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싸고 있는 비닐 포장지에는 친절하게도 조리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고 계란과 파를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이 난다는 조언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자취 생활 삼 년 가까이를 그 문명인의 대용식사와 친분을 돈독히 해 왔고 조리법은 물론, 달리 후라이 팬에 튀겨먹는 법, 밥솥에 쪄 먹는 법, 전골해 먹는 법까지도 아울러 잘 알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계란과 파보다는 메추리알 몇 개와 생미역 무침을 곁들여 먹을 때가 더더욱 맛이 난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남비에 그냥 끓여 먹기로 작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란이니 메추리알은 커녕 개미알 한 개도 나는 준비해 두지 않았으니까.
창자여, 잠깐만 기다려다오. 참을성이 있어야지. 나는 남비에 물을 붓고 석유 곤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려 보오들레에르의 <나심(裸心)> 오십 삼 페이지를 펴 들었다.
젊은 작가가 자기의 첫 교정(校正)을보는 날, 그는 마치 처음 매독에 걸린 학생처럼 자랑스러운 것이다.

물과 카드와 손금 등등으로 하는 점술(占術)에 관한 장(章)을 잊지 말 것.
여자는 영과 구별할 줄 모른다. 마치 짐승처럼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익살꾼은 말할지도 모른다. 하기야 육체밖에는 없으니까, 라고 몸치장에 관한 일 장(章).
몸치장의 도덕성.
몸치장의 교묘함.

교수와,
판사와,
대신들의
잘난 체 뽐내는 꼴.

오늘날의 희안한 거인들.
르낭.
훼도.
오끄따브 훼이에.
스꼴.

신문 편집장들, 우쎄에, 루이, 지라르랑, 때끄시에,드까론느, 쏘라르, 뛰르강, 다로.
쌍놈의 명단. 첫머리에쏘라르.

이름이 상당히 보들보들한 느낌을 가진 보오들레에르는 상당히 거칠게 말하고 있다. 이름을 꺼끌레에르고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몇 장을 훌쩍 뛰어 넘어 보았다. 칠십 일 페이지가 나왔다.

이끼를 넉넉한 냉수 속에 열 두 시간 내지 열 네 시간 동안 적셨다가 물을 버릴 것.
이끼를 두 리트르 물 속에 넣어 약한, 변함 없는 불로 끓이기를 두 리트르 물이 한 리트를 졸아들 때까지 하고, 겉거품을 걷을 것. 이렇게 된 다음 이백오십그람 흰 설탕을 넣어서 시럽 액체처럼 진하게 만들 것. 다음 다시 식힐 것. 썩 큰입 숟갈로 세 번, 아침 낮 저녁으로 먹을 것. 발작(發作)이 너무 잦을 때에는 걱정 말고 양을 불려도 좋다.

대단한 악담가이시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라면 조리법을 연상했었다.
어딘가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끓는 물 육백cc에 라면을 넣고 삼 분 정도 기다릴 것, 다음 스프를 넣고 일이 분 정도 더 기다릴 것, 구미에 맞춰 계란이나 파를 곁들이면 더욱 맛이 남, 너무 불어 터져서 먹기 거북하면 개에게 주어도 좋다....
나는 몇 페이지를 더 읽다가 책을 덮었다. 남비의 물은 아직도 끓지 않고 있었다. 무료하다. 무엇을 할까.
내가 잠시 망설이고 있을때갑자기 라디오의 쏴아 하는 강물 소리가 뚝 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뻐꾹시계가 걸려 있던 벽을 쳐다 보았다. 거기 껍질뿐의 시계가 덩그마니 걸려 있었다. 밤새도록 죽어 나간 나의 시간이, 그 시간의 잿가루가 껍질뿐의 시계 속에 가득 쌓여 있는것을 나는 보았다. 곧 라디오 속에서는 아나운서의 건강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애청자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과 웃음이 같이 하길 빌면서....
아나운서의 인사말이 끝나고 연이어 애국가가 조용히 연주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아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모두 들었다. 그 내 나라의 노래는 엄숙하고 다감했다. 한참 동안을 내 살 속에 스미어 보이지 않는 힘과 믿음이 되어 주었다. 이제는 이른 아침, 우울해 하지 말 것. 그러나 깊은 생각도 버리지 말 것.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속이 텅 빈 시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난 밤의 허무를 되씹으면서 오래도록 방 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있었다. 생각컨데 마지막 가을비가 될 거였다.
이 비가 끝나면 날씨는 싸늘해지고, 그러면 겨울이 오는 것이다.
나는 품 속에서 쇠붙이 하나를 꺼내었다. 그것은식어 가는 새벽 형광등 불빛에서도 순금의 광채로 번쩍이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훈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드러운 헝겁으로 닦기 시작했다.